해방 이듬해인 1946년 7월29일, ‘정판사 사건’ 제1회 공판이 열렸다. 서울 시내 정동에 자리잡은 지방법원 일대에는 새벽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재판을 방청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개정 예정 시간인 오전 9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군중은 수천 명에 달했다. 법원 정문(북문)과 후문(서문)에 인파가 운집했다. 법원으로 향하는 길에도 사람들이 들어찼다. 남대문로, 정동예배당, 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늘어섰다.
법원 안팎에 무장 경찰대가 삼엄한 경계망을 폈다. 기마대도 동원됐다. 수갑을 찬 피고인들이 트럭으로 호송돼 오자, 그를 목격한 군중이 점차 격앙됐다. “피고는 무죄다” “모략 재판을 분쇄하라” “재판을 공개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해방의 노래와 혁명가를 불렀다. 급기야 군중의 압력으로 법원 출입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물결처럼 법원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무장 경찰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경동중학교 3학년생 전해련이 숨졌다. 탄환이 왼쪽 뺨을 뚫고 들어가 왼쪽 아래턱뼈를 부수고 뒷목 근육 속에 박혀 있었다고 한다. 또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 가운데 50명이 미군 포고령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됐다.1
이처럼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킨 ‘정판사 사건’이란 도대체 어떤 사건인가? 그것은 조선정판사라는 명칭의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발행했다는 혐의로 13명의 피의자를 기소한 사건을 말한다. 피의자 중에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 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 거물급 인사가 포함됐다. 미군정에 따르면,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의 파렴치한 범죄였다. 공산당 중앙간부가 직접 나서서 당 경비를 조달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할 목적으로 1200만원어치의 막대한 위조화폐를 만들어 유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고인들의 주장은 달랐다. 이 사건은 공산당의 도덕적 위신을 추락시키려 날조한 것이며,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호소했다. ‘정판사 사건’의 피고인들을 대변하는 9명의 변호사가 있었다. 가나다순으로 하면 강중인, 강혁선, 김용암, 백석황, 오승근, 윤학기, 이경용, 조평재, 한영욱이 그들이다.
그중에서 김용암(金龍巖, 1909~1951)이 주목된다. 그는 변호인단 속에서도 두드러졌다. 4개월에 걸친 공판 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예컨대 최종 변론에 임하여 4시간 동안 17개 조항에 걸쳐 열변을 토했다. 그의 변론은 가장 상세하며 논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적극적인 변론 때문에 그는 미군정 경찰의 체포령을 받았다. 1946년 12월부터 도피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도피 중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47년 2월에는 방대한 분량의 상고이유서(An Explanatory Statement for Appeal to the Superior Court for ‘Counterfeit Case at Jung-Pan-Sa’)를 작성했고,2 4월에는 <소위 ‘정판사 위폐사건’의 해부–반동파 모략의 진상을 폭로함>을 집필했다. 요컨대 그는 ‘정판사 사건’의 진실을 다투는 가장 적극적인 이론가였다.
김용암이 변호사가 된 것은 1938년 7월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때부터였다. 합격자는 13명이었다. 이 중 조선 사람이 10명, 일본 사람이 3명이었다. 조선인 가운데는 뒷날 6선 국회의원을 지낸 윤길중, 대검찰청 차장검사직에 오른 소진섭, 대법원 판사 사광욱도 포함됐다.
시험은 3단계로 이뤄졌다. 맨 처음 예비시험을 치렀다. 지원자 256명이 응시했고 그중 28명이 합격했다. 예비시험이란 시국관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전문학교 수준의 학력을 요구했다. 그해 예비시험 문제는 ‘봉공의 정신을 논하라’ ‘시국하의 생활개선을 논하라’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작문하라는 내용이었다.3 법률전문학교나 제국대학 예과를 졸업한 수험생은 예비시험을 면제받았다. 김용암도 예비시험 면제자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2단계는 필기시험이었다.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국제사법, 경제학 등의 과목을 나흘에 걸쳐 응시했다. 예비시험 합격자 28명과 면제자 106명을 합한 188명이 시험을 봤는데, 13명이 합격했다.4
3단계 구술시험은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및 형사소송법 가운데 3과목을 치렀는데, 떨어진 사람은 없었다. 이 시험은 일종의 요식행위였던 것 같다. 요컨대 전체 응시자 가운데 상위 3.6%에 해당하는 사람만 최종 합격할 수 있었다. 바늘구멍이었다. 그 구멍을 통과한 몇 안 되는 사람 속에 김용암도 포함됐다. 29살 때의 일이었다.
김용암은 1년6개월간의 ‘변호사 시보’ 시절을 거쳤다. 변호사 시보란 1936년 개정된 ‘조선변호사령’에 의거한 제도인데, 개업 중인 기성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해 그 근무방식을 관찰하며 실무를 익히는 수습 변호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객 응대, 사건 수임, 법정 변론 등의 사무를 익혔다.
김용암이 변호사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개업한 것은 1940년 8월이다. 변호사는 안정적인 고수입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각광받는 직업이었다. 1930년대 중반 변호사 평균 수입은 월 250원이었다. 같은 시기 다른 직업군의 경우를 보면, 신문기자 70원, 목사 50~60원, 금융조합 이사 70원, 식산은행원 95원, 판검사 초봉 100원 등이었다.5 그 시기 중상층 전문직종의 급여보다 세 배 정도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화문 동십자각 건너편 중학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해방될 때까지 변호사업에 종사했다.
김용암이 진보적인 사회의식을 갖게 된 것은 10대 후반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할 때였다.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창촌리 양상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7살 되던 해에 경성고보에 입학했다. 고향에서 80㎞ 떨어진 객지였으므로 학비며 숙식·생활비 등으로 적지 않은 유학비가 들었지만, 부유한 종조부가 뒤를 댔다. 아버지가 9살 때 돌아가시고 유산이라고는 밭이 4천 평가량 있을 뿐이었다.6 홀어머니가 두세 살 터울의 어린 남동생과 누이를 거느리고 어렵게 살림을 이어갔다. 종조부의 학비 지원을 받은 것을 보면 김용암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것 같다.
항일 동맹휴학·연합시위로 두 번 퇴학경성고보는 그의 사상의 고향이었다. 5년간 재학 중에 두 번이나 퇴학당했다. 한 번은 3학년 되던 1928년 봄 일본인 교원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 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주동자로 지목됐던 것 같다. 가장 높은 수준의 징계 처분인 퇴학을 당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듬해 봄 복학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전 조선에 걸친 동맹휴학 퇴학생 복교령을 발령한 까닭이었다.
복학 1년 만에 또다시 퇴학 처분을 당했다. 이번에는 광주학생운동이 도화선이 돼서 발발한 전조선학생운동 때문이었다. 1930년 1월25일 한낮에 함경북도 경성고보와 경성농업학교의 연합거리시위가 벌어졌다. 경성 읍내 서문 밖에 두 학교 학생 1천 명이 집결해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운동에 나섰다. 8개의 대형 깃발이 앞장섰다. ‘광주학생사건의 실제 내막을 사회에 고하라’ ‘학원의 독립을 기할 것’ 등의 요구사항을 적은 깃발이었다. 시위대는 길거리에 ‘우리는 단결하자’고 쓴 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했다. 이윽고 경찰대가 긴급 투입됐고, 현장에서 학생 100여 명이 체포됐다.7
주목할 점은 운동 양상의 선진성에 있다. 연합거리시위는 학생운동의 가장 높은 수준의 운동 형태였다. 둘 이상의 중등학교가 연대해 동시에 거리에 진출해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양상은 학생운동이 매우 발달한 곳에서만 나타났다. 1929년 11월3일과 11월12일 광주에서 두 차례 출현했고, 서울에서도 1929년 12월9일과 1930년 1월15~16일 두 차례 나타났다. 그 뒤로는 평양에서 1월21~22일 이 운동 양상이 나타났을 뿐이다.
더 놀라운 현상이 있었다. 도시 주민층이 호응하고 나선 점이다. 상인층이 움직였다. 시내 조선인 상점 대다수가 동맹 철시해 학생들에게 동정의 뜻을 표했다. 시위 이튿날에는 학부모를 중심으로 시민대회도 열렸다. 그 자리에서 학생들의 석방을 교섭하기 위한 대표단이 선출됐다. 그뿐 아니라 사상단체와 경성청년동맹 같은 사회단체도 움직였다. 학생시위에 호응하는 집회를 개최하려는 형세가 있었다. 이런 양상은 전국적으로도 보기 어려운 획기적인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처음 표출된 현상이었다. 거대한 민중봉기로 나아갈 가능성을 갖는 징검다리 같았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1930년 1월27일 경성고보 학생들이 또다시 거리시위를 감행했다. 한낮에 수십 명의 학생이 ‘전조선 학생을 석방하라’는 글씨를 쓴 붉은 깃발 8개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경찰 주재소로 압박해갔다.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들었고 격문 수백 장을 살포했다. 제2차 거리시위를 조직할 만큼 놀라운 조직력과 용기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김용암은 경성고보 학생시위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뒷날 작성한 이력서에서 자신과 함께 맹종호, 이홍우, 최청룡 등이 경성고보 학생운동을 이끈 조직자들이라고 술회했다.8 그는 학생운동에 참가한 대가로 경성고보생 31명과 함께 청진검사국으로 송치됐다. 그 후 청진형무소에 약 1개월간 갇혔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했다.
그 후 김용암은 부유한 종조부의 경제적 후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교토 료요(兩洋)중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했다. 그는 변호사가 된 뒤에도 청년 시절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나이에 함북 경성고보에서 익힌 사회의식을 줄곧 견지했던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5년, 68~72쪽
2. 고지훈, ‘자료소개: 정판사사건 재심 청구를 위한 석명서’, <역사문제연구> 20, 2008년 10월
3. 전병무, ‘일제하 한국인 변호사의 자격 유형과 변호사 수입’, <한국학논총> 44,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2015년, 318쪽
4. ‘변호사시험 13명 합격’, <동아일보> 1938년 8월9일
5. 전병무, 앞의 글, 331~332쪽
6. 김용암, <자서전> 1948년 6월9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8 л.14-16об
7. ‘경성고보, 농교생 일시에 만세시위’ <조선일보> 1930년 1월27일
조선총독부 경무국, <光州學生事件及其ノ影響 其ノ二, 新學期開始後ニ於ケル學生事件裏面策動ノ狀況> 1930년 1월, 114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8. 김용암, ‘간부리력서’, 1948년 6월9일, 4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8 л.12-13об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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