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전하자. 우리 둘 다 충전 좀 하자. 충전 20%.” 남자가 말한다. “충전 30%.” 꼭 껴안은 여자가 말한다. “난 31%, 32%. 우리 이렇게 딱 1000%만 빵빵하게 충전하자. 33%, 34%, 35%.” 남자가 다시 말한다. “35.1%.” 여자가 말한다.
이 장면을 보면 흐뭇하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 나도 옆에 있는 아무라도 꼭 껴안고 충전하고 싶어진다. 하긴, 아무나 껴안으면 충전이 안 되지. ‘추앙’과 ‘블루스’ 사이에서 존재감이 미미한 채 2022년 6월9일 막을 내린 KBS 드라마 <너에게 가는 속도 493㎞>(이하 <너가속>) 속 장면이다. <너가속>은 배드민턴 실업팀 선수들이 운동하고 사랑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다. 남자는 채종협(사진 오른쪽)이 연기한 박태준, 여자는 박주현이 연기한 박태양이다.
비록 시청률 1%대지만 <너가속> 팬들에게는 그래서 더 아쉽고 절절한 드라마였다. “유튜브 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역주행하려 찾아보니 지금 방영 중이네요. 이 정도면 KBS(방영된 방송사)가 안티 아닌가요” “홍보 탓인가? 이거 진짜 재밌는데 시청률 왜 이래?” “너어무 재밌고 너어무 설렘” 등등. 소수의 팬이 유튜브 방송내용 요약 영상에 눈물로 댓글을 쓰며 더 많은 사람과 설렘을 나누고 싶어 했더랬지.
나에게 <너가속>은 ‘위로’로 설렘을 선물받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박태준의 누나는 ‘비운의 사고로 선수 생명이 끝난 천재 선수’다. 박태준은 늘 누나와 비교당하다 마음이 다쳐 자기가 가진 “애매한 재능”을 인정하지 못한다. 박태양은 태준의 누나가 비운의 사고를 당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터라 숨어버렸다가 3년 만에 복귀해 실력은 줄고 죄책감만 가득하다.
하지만 태준은 ‘위로’의 천재다. 복귀한 뒤 팀에서 따돌림당하고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아 엉엉 우는 태양에게 “야, 너 드디어 우는구나. 울 때가 됐지. 박태양 운다. 우는 거 구경할 사람?” 소리치며 태양이 태준을 잡으러 다니느라 슬픔을 잊게 한다. 구구절절한 성장사를 머뭇머뭇 꺼내는 태양에게 과거 자신과의 인연을 일깨우며 “내가 진짜 은인이네. 내 은혜 평생 갚을 수 있겠어?”라고 답해, 태양이 생각의 전환을 하게 한다. 태준의 위로는 <상담심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상담 기법과 유사하다. 부정적 사고로 우울함에 빠진 내담자가 부정적 사고에서 빠져나오도록 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탁월한 위로자.
태양 역시 태준을 응원하며 위로한다. “네가 나를 인정하는 것의 절반만 너를 인정했다면 ‘탑’이 됐을 거야.” 적당히 운동하는 것으로 부족한 성적에 자존심을 지키고 자기 ‘재능’을 회피해온 태준이 달라진다. 뜨겁게 운동하는 선수가 된다.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할퀴지 않고 응원하는 것이 이토록 설레는 순간일 줄이야. 세상살이 하며 받은 상처로 딱지 앉은 내 심장에 새살이 돋는 기분을 종종 느꼈다. 결국 옆 사람이 아니라 ‘쌍박이’(박태양과 박태준 커플을 일컫는 줄임말)가 나오는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충전하며 KBS 관계자들에게 소원을 말해본다. “<너가속> 시즌2 만들어주세요.”
리담 칼럼니스트 dorisleewall@gmail.com
*바야흐로 유튜브 시대. 1분에 업로드되는 동영상은 500시간, 매일 10억 시간 이상 동영상이 조회된다. 이 통계에 혁혁히 일조하며 ‘관련 동영상’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급기야 매일같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저자의 외침! 유혹에 ‘금사빠’가 돼버렸지만,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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