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김혼비, 아무튼 우아하고 호쾌하게 다정한 글쓰기 [21WRITERS②]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다정소감> 쓴 김혼비 작가 인터뷰
등록 2022-03-22 19:02 수정 2022-03-26 11:08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김혼비, 이런 친구와 자주 만나 놀고 싶다 [21WRITERS①]에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64.html

잠깐만 이 대화 너무 재밌는데, 내가 써도 돼?

-어디에서 영감이나 동력을 얻으시나요?

“그냥 출퇴근길 걷다가 간판이나 풍경이나 들려오는 어떤 대화나 이런 데서 얻기도 하고, 에스엔에스(SNS) 돌아다니면서 누군가의 일상 사진이나 글에서 얻기도 하고,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얻기도 하고, 술이나 음식에서 얻기도 하고. 왜 일상을 살아가다가 아주 짧게나마 자신을 멈칫하게 하는 순간을 딱 붙잡고 왜 멈칫했지, 뭐가 나를 멈칫하게 했지를 계속 고민하는 게 영감을 길어 올리는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인 것 같아요. 떠돌던 영감을 이렇게 붙여보고 저렇게 연결해보고 순서도 바꿔보고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게 진짜 중요해요. 저는 산책하거나 운동할 때 그런 생각을 제일 많이 해요. 장강명 작가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영감은 항상 불완전한 형태로 온다.’ 완전한 형태로 오지 않은 영감을 완전한 형태로 바꾸는 게 작가의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공감했어요. 동력은, 마감을 빨리 마치고, 하고 싶은 일이 저를 움직이는 거 같아요. 이거 빨리 써야 저거 할 수 있어. 이게 가장 큰 동력이에요.”

-글쓰기 루틴(습관)이 있나요?

“루틴 질문 받을 때마다 부끄러운데요. 매일 꾸준히 쓰지는 못하고 약간 몰아서 쓰는 타입이에요. 그래서 연재도 힘들었고요. 평소에 메모는 열심히 해요. 왔다 갔다 하다가 뭔가 기억해두고 싶은 건 음성녹음도 하고, 꼭 잊고 싶지 않은 일은 일기에 길게 쓰기도 하는데, 마감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발행할 만한 형태의 글을 쓰는 게 없어요. 퇴근하면 운동도 하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고, 술도 마시고 싶고, 드라마도 보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고. 그래서 항상 글이 뒤로 밀려서 책 마감을 해야 할 시점이 오면 한두 달 동안 약속을 잡지 않고 회사와 집만 오가며 글을 쓰는 게 루틴이라면 루틴이에요. <아무튼, 술>도 한 달 반 동안 퇴근한 뒤와 주말 오전에 몰아서 글을 썼고, <전국축제자랑>은 연재가 끝나고 또 연재 분량만큼의 글을 몰아서 더 썼는데, 그때도 두 달 동안 아무 약속도 안 잡고 썼어요. 연재는 정말 매달 한 편씩 무조건 써야 하는 일이잖아요. 이게 저에게는 정말 안 맞더라고요. 매일 꾸준히 몇 시간씩 쓰는 작가님들 너무 존경스러워요.”

-자료 수집이나 저장은 어떻게 하시나요? 아이템 추천을 해주신다면요?

“수시로 메모해요. 음성 녹음할 때도 있고, 친구들이랑 얘기하다가도 ‘잠깐만 이 대화 너무 재밌는데, 이거 언젠가 내가 써도 돼?’ 동의를 얻어 옮겨놓기도 해요. 아날로그 메모를 제일 선호해서 노트에 적어서 20권쯤 쌓여 있고, 그림을 그려놓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수집한 자료는 에버노트(온라인 메모장)에 기록해요. 열심히 메모하고 분류까지도 잘하는데, 잘 안 열어봐요.(웃음) 다시 안 읽는 메모는 쓸데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시간을 들여 메모해놓으면 나중에 내가 어디다 썼는지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많은 분이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메모를 안 하시는데, 아닙니다. 나중에 안 열어보더라도 하는 행위는 정말 중요합니다.”

-작가님 마음속 작가는 어떤 분인가요?

“‘김솔통’(김솔을 담는 통으로, <다정소감>에서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글을 여기에 비유했다. 김솔통 연관 검색어로 ‘김혼비’가 뜬다. 상품명으로 ‘통김솔’로 부르기도 한다.) 같은 글이 뭐예요 하고 물으면 저는 시미즈 히로유키의 <한국 타워 탐구생활>이란 책을 얘기해요. 한국에서 카페를 하는 일본 분이 쓴 이 책을 2015년에 읽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타워라는 것 자체가 쓸 데가 없잖아요. 이분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한빛탑같이 유명한 곳도 가지만 지나가다보면 ‘저기 웬 타워가 있어?’ 하는 곳도 가서 진지하게 관찰하거든요. 무서운 정도, 쓸데없는 정도… 내용도 되게 웃겨요. 작정하고 웃긴 건 아닌데 은은한 웃김 있잖아요. 쓸데없이 진지함에서 오는. <전국축제자랑>은 이 책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이걸 안 읽었으면 <전국축제자랑>은 못 썼을지도 몰라요. <전국축제자랑>을 쓰기 전에, 너무 서울 사람에게 편향된 시선이면 어쩌지, 그렇지 않아도 너무 서울 공화국인데… 그런 걱정을 할 때 편집자가 얘기해줬어요. <한국 타워 탐구생활>이 최애 책이라면서요? 서울 사람이라도 지역의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더 써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게 낫지 않으냐고.

글 쓰다가 영감을 얻고 싶을 때는 화집같이 그림이나 사진 이미지를 보는 거 같아요. 동력을 얻고 싶을 때 운동하는 언니들을 봐요. 요새 읽는 책은 김연경 선수의 자서전 <아직 끝이 아니다>예요. 글뿐 아니라 다른 일도 하다 잘 안되면 이 책을 읽어요. 예전엔 김연아 선수 영상을 찾아봤어요.

김혼비 작가가 작업을 하기 전에 뿌리는 향수. 출판사 대표가 선물했다. 김혼비 제공

김혼비 작가가 작업을 하기 전에 뿌리는 향수. 출판사 대표가 선물했다. 김혼비 제공

글을 쓰기 위해 애쓴다는 것만으로

-요즘엔 여자축구의 매력을 알려면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라고 권하신다고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는 것보다 TV 프로그램을 보는 게 더 쉽고 빠르죠. 글이 다른 매체에 비해 힘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요.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요?

“글은 누구한테 보여주지 않더라도 나를 구원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글과 나의 일대일 관계에서요. 저에겐 지루한 책이 별로 없어요. 지루해도 문장이 재밌을 수도 있고, 문장조차 재미없고 내용도 재미없어도 그 책을 끝까지 읽는 편이거든요.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이 사람의 글쓰기 행위를 목격하는 것만으로 기뻐요. 이 한 권을 써낸 거잖아요. 저한테는 아직도 이 시대에 진지하게 백지 앞에서 글을 쓰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어요.

글쓰기 수업을 할 때도 한번은 전혀 글을 쓰지 않은 이를 대상으로 9주간 수업한 적이 있는데, 그분들이 가끔 잊을 만하면 글을 보내오세요. 울컥하네요. 그 글들을 볼 때 눈물 나는 게 있어요. 저와 처음 만났을 때는 문장을 어떻게 쓸지 모르겠어요, 하던 분들이에요. 연세가 좀 있으셔서 글을 안 써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 익숙지 않은 노트북 앞에서 글을 쓰려고 애쓰는 모습을 상상할 때 그것만으로도 제가 위로받는 느낌이에요. 글을 쓰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위로가 돼요.

운동선수들한테서 영감을 받는 거랑 비슷한데, 이걸 하려고 끊임없이 훈련하고 노력하는 게, 완성도와 상관없이 붙들고 있는 행위 자체가 제게 동력을 줍니다.”

에필로그

호리호리한 여성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얼굴 가린 사진만 봤지만, 이 사람이 김혼비 작가구나 바로 알 수 있었다. 축구장에서 거친 몸싸움을 하기엔 좀 밀릴 것 같은 체격이지만 빠른 발이 장점이라고 하니 과연 그렇겠다 싶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 엿새 만에 하는 외출이라고 했다.

김혼비 작가는 감동을 잘 받았다.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배려해 사진을 찍는 사진기자에게 감동하고, 인터뷰를 위해 읽고 쌓아둔 자신의 책들을 보고 감동하고, 분위기를 빨리 녹이기 위해 준비한 맥주에 감동했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 삶에서 ‘다정의 패턴’을 선택했듯이 사소한 배려에도 감동을 선택할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 부정적인 것이 왜 없을까만, 조심스럽고 고집스럽게 ‘좋은 쪽을 선택하고 내가 만든 의미를 간직하는’ 습관을 목격한 기분이 들었고, 곧바로 따라 하고 싶어졌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808/

*한겨레21 1405호~1406호(통권호) 구매하기

https://m.smartstore.naver.com/hankyoreh21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0582872&start=slaye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