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제주도민과 예멘인의 문화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희망의 학교’가 있다. 2013년부터 독일 베를린과 제주를 오가며 활동해온 김성은(38) 영상작가는 ‘희망의 학교’가 주최한 ‘예멘 여성과 제주 여성의 차 마시는 모임’에서 야스민을 처음 만났다.
예멘 출신인 야스민은 수단에서 카타르, 벨라루스,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에 왔다. 그는 2018년 여름 대한민국에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 484명 중 한 명이다. 지금은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인도적 체류 허가 지위를 얻은 339명 중 한 명이 됐다. 예멘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일했던 야스민은 성은에게서 카메라 사용법을 배웠고,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야스민은 카메라를 든 지 두 달이 채 안 돼 생계로 인해 갑작스레 제주를 떠났다. 서울로 떠나면서 야스민은 작별 인사를 카메라에 남겼다.
성은은 야스민의 작별 편지를 국적, 성장 배경, 직업도 모두 다르지만 각종 개발사업으로 황폐해지는 제주를 지키려는 친구들에게 전달하며 영화 촬영을 이어갔다. 영화라는 힘을 빌려 야스민을 기억하지 않으면 그의 존재 자체가 삭제될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작업을 지속했다.
성은의 장편 다큐멘터리 <섬이 없는 지도>는 그렇게 완성됐다. <섬이 없는 지도>는 2021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섹션에서 첫선을 보였고, 11월20일 부산독립영화제와 12월 초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상영을 앞두고 있다.
7년 넘게 베를린과 제주를 오가다 2019년부터 제주에서 사는 성은이 생애 첫 이주를 시작한 건 고작 17살 때였다. 그것도 국내가 아닌, 먼 미국 땅에서.
경기도 수원에서 나고 자란 성은은 줄곧 집을 떠나고 싶어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숨 막히는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벗어나고자 대안학교 진학을 계획하기도 했고, 어릴 때부터 꾸준히 그림을 그렸기에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꿈꿨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서점에서 우연히 한 유학원 원장이 쓴 책을 읽고 성은은 결심했다. 더 먼 곳으로 떠나보자고.
“2000년대 초반 당시에 조기유학 붐이 있었어요. 부유층만 가던 유학 문이 조금 더 열렸고, 책을 보며 예산이 적게 드는 학교를 찾을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렇게 17살에 혼자 씩씩하게 비행기 타고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주 한 시골 마을에 있는 가톨릭 고등학교 기숙사에 도착했어요.”
동양인이 거의 없던 미네소타주에서 성은은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존재로 살아야 했다. 언어가 들리고 입이 트이는 데 짐작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머릿속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보니 말수는 점점 줄었다. 그래도 미술 시간만큼은 숨이 트였다. 성은은 표현하고 싶은 무언가를 그림으로 그리는 일만큼은 자신 있었고, 순수미술 전공으로 뉴욕대학교에 합격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도시여서, 뉴욕이 좋았다.
“뉴욕이 흥미로워서 갔지만 미대를 다니며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모든 예술이 그렇듯 미술 영역도 경쟁이 심하지만, 그래도 보통 학생일 때는 학교 안에서 경쟁하잖아요. 뉴욕은 달랐어요. 뉴욕대가 아니라 뉴욕시 예술계 모든 작가와 경쟁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때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바로 직전이라 미술산업에도 거품이 최고조로 부풀었을 때이기도 했고요. 학교에 있으면 갤러리에서 ‘아트 스타’로 키워주겠다며 학생을 막 스카우트해가요. 이후엔 맨해튼의 문화예술 중심지인 첼시 지역에서 전시를 열어주고 반응을 본 뒤, 좋으면 계약하고 아니면 가차 없이 버려졌죠. 나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기분이었고, 뉴욕에서 미술 작업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미대 졸업 뒤 뉴욕 상업미술계에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성은은 대학 3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독일 베를린이 잊히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베를린은 민간 부동산회사의 고급주택 개발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기 전이라, 강가만 걸어도 동독 흔적을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었다. 생활비도 저렴했다. 한국돈으로 약 40만원이면 집세 내고 살 수 있었다. 성은은 베를린이라면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곳’이라고 답을 내렸다. 뉴욕 친구들이 “갑자기 왜 베를린에 가느냐”고 물었을 때 성은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살려고.”
성은은 뭐가 되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게 없는 상태에서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자신의 20대를 돌이켜보며 그는 ‘정해놓은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기보다 그저 둥둥 떠다녔던 시간’이라고 반추했다. 둥둥 떠다니는 자신이 싫었던 건 아니지만, 베를린에서 공동체적인 삶을 접하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베를린의 대표적인 퀴어 프렌들리 카페이자 바인 뫼벨 올페에서 일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뫼벨 올페 운영진은 느슨한 퀴어 공동체였는데, 직원이 모두 카페에 직접 고용됐고 구성원 모두가 카페 운영에 동등하게 참여했다. 각자 월급을 받았지만 수익이 나면 구성원 모두와 나눴다. 성은에게 이 공동체는 확장된 대안 가족이었다.
“뫼벨 올페에서 일하면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다는 게 어떤 건지 배웠어요. 공동체적인 삶, 그리고 사회적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 눈뜨게 됐고요.”
한국 이슈를 적극적으로 찾아본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 쌍용차 해고노동자 천막농성, 한진중공업 파업 때 운영된 희망버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 등 여러 이슈가 있었지만 유독 강정마을 이야기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성은은 강정을 지키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2013년 3월,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제주로 갔다.
강정마을 현장을 본 이후부터 그는 한 해의 절반을 강정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미디어아트 작업을 꾸준히 해왔던 성은은 20대 초반부터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다녔고, 어딜 가든 일상을 기록했다. 강정에 대한 현장 연구를 제대로 하고 싶어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영상인류학 석사 공부도 시작했다.
강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 것은, 그곳에서 또 한 번 공동체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고 평화운동을 하는 강정지킴이 공동체를 통해 제주의 여러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하룻밤 사이 사라진 비자림로의 삼나무를 지키려는 시민들, 제2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도청 앞 천막촌 사람들, 예멘 난민을 환대한 ‘희망의 학교’ 친구들. 성은은 7년 넘게 함께해온 강정 친구들이 해군기지 완공 이후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밟혀, 2019년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이주했다. 현재 강정마을 옆 하원마을에 살며, 카메라를 매개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공동의 기억을 기록하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수년간 카메라에 담은 그의 영상은 최근 발표한 작품 외에도 강정 투쟁을 기록한 첫 장편 <스물다섯번째 시간>으로 만들어졌다. 강정을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꾸준히 운영 중인 유튜브 채널 <강정 일기>(www.youtube.com/user/diaryofgangjeong)도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다.
“저에게 제주는 강이나 바다, 숲과 처음으로 교감했던 곳이고, 이곳에 함께 사는 다양한 존재와 공존하는 법을 매일 배우는 곳이에요. 한편으로 외지인이라는 제 정체성이 절대 바뀔 수 없는 역사를 가진 곳이기도 하지만, 이방인으로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설적인 공간이기도 해요. 제주에서는 지금까지 이동이 많았던 제 삶과 달리 최대한 머무름을 시도해보려고요. 강정 공동체를 지키고 싶어요.”
제주에서 활동가와 영상작가, 영화감독 사이를 즐겁게 횡단하고 있는 성은과 그의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며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라는 시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후략)”
환대·평화·공존을 고민하는 이들이 성은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섬, 제주. 성은과 그의 친구들이 들려주는, 그간 몰랐던 제주 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꾸 섬에 가고 싶어진다.
채혜원 객원기자·<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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