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사는 동안 북서부 도시 브레멘을 여행하기 전까지 동화 <브레멘 음악대>를 알지 못했다. 제목은 여러 번 들어봤지만 동화를 정독한 적은 없었다. 도시 곳곳에 동화 주인공인 동물 형상의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갑자기 동화 내용이 궁금해졌고 책을 찾아 읽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브레멘 음악대는 브레멘에 도착하지 않았다.
당나귀, 개, 고양이, 닭으로 구성된 ‘브레멘 음악대’는 음악하러 브레멘으로 떠난 길에서 아늑한 오두막집을 만났고 그 집에 머물며 행복하게 살기로 한다. 동화는 이렇게 끝난다. “Und wenn sie nicht gestorben sind, dann leben sie noch heute.”(그리고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발견하자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한다. 브레멘을 향하는 여정이었지만 길 위에서 다른 행복을 찾았다. 이 연재를 통해 만난 대부분의 이주자 역시 그러했다. 현재 정착해 사는 곳이 목적지인 이는 없었다. 행복을 찾는 여정이 길 위에서 이어졌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 곳에 도착했다.
2018년부터 전북 군산에 사는 김나은(29)도 마찬가지다. 경북 영천이 고향인 그는 영화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영천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시민극장 한 곳밖에 없는 탓에(현재는 두 곳) 기차와 버스를 타고 왕복 2시간 거리의 대구까지 영화를 보러 다녔다.
다양한 문화콘텐츠에 관심이 많은 나은에게 영천은 조금 갑갑한 곳이었지만 특별한 곳으로의 이주를 계획하진 않았다. 그저 나고 자란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대전에 있는 국립대 진학을 선택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었다.
이후로도 계획이 아닌 상황에 따른 이동이 잦았다. 휴학한 뒤 서울로 이사했다.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로도 일했고 신림동 고시촌에 머물며 경찰 간부 후보생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가 복학한 뒤로는 세종시에 있는 방송사에서 1년간 일했다.
드라마 피디(PD)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졸업 뒤 어머니가 사는 군산 집으로 거취를 옮겼다. 영천에서 오랜 세월 자영업자로 살아온 어머니는 나은의 대학 진학 뒤 가게를 정리하고 가까운 가족이 사는 군산으로 이사해 살고 있었다.
취업을 준비하며 잠시 머무는 임시거주지로만 생각하고 아무 정보도 없이 군산에 왔지만, 그에게 군산은 들여다볼수록 아름다운 곳이었다. 청암산과 바닷가, 은파호수공원을 산책하면서 매일매일 작은 행복이 쌓였다. 게다가 영화관이 바로 집 앞에 있었다(군산에 영화관은 세 곳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 학창 시절 2시간 거리를 오갔던 그는 창문 밖 영화관을 보며 외쳤다.
“엄마, 여기 억수로 좋다. 집 앞에 극장이 있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은은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발 딛고 있는 지역이 아닌 밖에만 관심을 두고 둘러본 건 아닐까. ‘군산에서 살아볼까’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바로 일자리를 알아봤다. 군산이 다른 지역에 견줘 일자리가 많지 않았기에 작은 기업들을 알아봤고, 그중 한 곳에서 마케팅과 해외 부문 일을 맡았다.
“솔직히 많은 이가 같은 마음일 거예요. 좋은 성적으로 국립대를 나왔는데 지역의 작은 기업에 다니는 게 여러 아쉬움이 들 수 있죠. 전 단순하게 생각하는 편이어서 결단을 내렸어요. 군산에서 살고 싶어? 그럼 일자리를 구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딱 한 달 직장을 다녔는데, 만족도가 너무 높은 거예요. 일상에 평화가 찾아왔죠.”
군산에 정착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진 건 주거 안정감에서 오는 행복이 크게 작용했다. 수도권에서는 원룸 오피스텔도 못 들어가는 전셋값으로 아파트(방 3개, 화장실 2개)를 구할 수 있었다.
직장과 집이 생기자 나은은 행복한 삶에 필요한 자신만의 세 가지 조건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꾸준한 노동과 그에 따른 정기적인 수입, 집을 통한 주거 안정감, 마지막은 영화와 글쓰기 모임 등을 통한 문화적 성취. 군산은 마지막 조건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곳이었다.
마지막 조건은 스스로 채워가고 싶었다. 그 중심에 페미니즘이 있었다. ‘지역’과 ‘여성’을 잇고 싶었다. 그 바람을 담아 2019년 페미니즘 독서 모임 ‘보다’를 만들었다. 모임이 1년 정도 지속되면서 여성감독 영화 상영회 등의 행사도 열었다.
이주했다고 이주지의 이야기가 쉽게 들려오진 않는다. 들으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이곳저곳을 다니며 열심히 들으려고 짧지 않은 시간 노력해야만 그곳의 이야기가 비로소 온다. 나은은 여성들을 통해 군산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작은 민들레 순례단이다.
군산에 온 지 1년쯤 됐을 때 대전에서 반성매매 활동을 하는 친구 현정을 통해 민들레 순례단을 알게 됐다. 2000년과 2002년 연이어 발생한 군산 대명동·개복동 성매매 업소의 화재 참사로 희생당한 여성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순례단은 현장을 찾는다.
여성 성착취의 역사를 알고 나니 나은은 늘 걷고 향유하던 군산 거리가 평화롭게 느껴지지 못했다. 아픈 역사를 지닌 장소들은 그리 멀지도 접근하기 힘든 곳도 아닌 나은의 일상 영역에 있었다.
그는 군산을 기반으로 페미니즘 문화 행사를 기획·진행하고 지역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는 팀을 꾸리기로 했다. ‘우리가 만났을 때’을 줄여 만든 ‘우만컴퍼니’(https://wuman.co.kr)가 탄생한 배경이다.
우만컴퍼니를 통해 군산 외 지역의 여성들과 만남이 이어졌고, 미국 공군부대를 위해 국가가 계획적으로 조성했던 기지촌 ‘아메리카 타운’의 역사 등 군산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됐다.
그는 ‘우만’을 만들고 여러 여성과 함께하면서 비로소 군산에 닻을 내린 기분이다.
“일자리야 언제든 옮길 수 있지만 우만은 군산에서 시작된 이야기잖아요. 이전에 제 미래를 생각하면 전국 지도를 떠올렸거든요. 지금은 군산 지도를 떠올려요. 이제 저에겐 군산이라는 지역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함께 써갈 우만 동료들이 있어요. 페미니즘으로 만나게 된 소중한 인연들이죠.”
2022년에는 지역문화진흥원 지원사업을 통해 ‘영화로운 개복’ 프로젝트를 따냈다. 전북 최초로 극장과 상설상영관이 들어섰던 개복동을 중심으로, 성매매 업소 화재 참사 공간의 현재와 과거를 기록하는 공동체 활동을 곧 시작한다. 시민들과 함께 ‘여성’과 ‘개복동’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개복여성영화제’를 상영하는 게 목표다. 개복동 상가에서는 시민들이 보고 싶은 여성영화를 선정해 보는 모임도 열린다. 이와 별개로 군산의 오래된 가옥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고령 여성 인터뷰를 통한 아카이빙(기록 보관) 작업도 한다.
우만컴퍼니는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멤버들이 바뀐다. 2021년 군산과 여성을 주제로 펴낸 책 <우만플러그 군산>을 만들 때는 7명이 일했고, 2022년에는 모두 4명의 여성이 함께한다. 대부분 직장인이거나 자영업자다.
언젠가 이 이야기들이 맞닿으리라‘우리가 만났을 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우만컴퍼니가 2021년 만든 책의 첫 장에 쓰인 문구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그동안 연재를 통해 만난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상도, 제주도, 충청도 등 서울이 아닌 곳에서 각자의 우물을 만들고 그 우물을 지역사회와 나누는 여성들. 이들의 이야기를 만나면서 희망 하나를 품게 됐다. 언젠가 결국, 이 이야기들이 맞닿는 순간이 오리라는 믿음.
<우만플러그 군산>을 함께 만든 나은의 동료 수정은 책에 이렇게 썼다. “내가 살고 있는 군산은 아무 기반이 없는 참으로 척박한 곳이라 생각했다. 우물이 있는 다른 지역을 보며 왜 내가 사는 곳에는 우물이 없을까 아쉬워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났을 때’, 여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우물을 팔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쓰이지 않은 시간은 많았다. 군산 여성들이 더 많이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채혜원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chaelee.p@gmail.com
*바깥에 사는 사람: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역으로 가서 지역살림을 꾸리고 공동체에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바깥에서, 길 위에서 그들이 전하는 희망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칼럼 제목은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2013년) 수록작에서 따왔습니다. 4주에 한 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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