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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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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를 간호하기 위하여

서울 16년 간호사 생활 정리하고 강원도 원주로 이주한 송성숙씨
“간호사 간호해주는 최초의 공간을 만들 거예요”
등록 2021-09-04 14:34 수정 2021-09-09 02:31
서울에서 16년간 간호사로 일하고 강원도 원주로 이주해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송성숙씨.

서울에서 16년간 간호사로 일하고 강원도 원주로 이주해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송성숙씨.

“대한민국 모든 고3이 그렇듯 고3 1학기가 정말 중요한데요. 그 시기에 W스터디센터를 만나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가 힘든데 이곳에서 밀도 높은 공부를 해낼 수 있었어요. 열심히 공부할 때마다 원장님이 격려해주셔서 제가 더 발전할 수 있는 여성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원장님이 모든 책상을 정리해주시고, 종일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영양식도 사주시며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덕에 W센터만의 면학 분위기가 완성됩니다. 덕분에 외롭고 지치는 고시 준비 기간 슬럼프를 극복하고 긍정 에너지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여성을 돕는 일 꿈꿨어요”

강원도 원주 시내 중심인 능라동길에 위치한 W스터디센터. 문 앞에는 이곳에서 자신만의 성취를 이뤄낸 또는 이뤄내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적혀 있다. 원래 중·고등학생만 받던 독서실이었지만 취업준비생이나 대학원생처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절실히 필요한 여성도 함께 공부하는 곳으로 변화했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W센터는 회원제(1일 5천원)이고, 24시간 문이 열려 있어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 공부할 수 있다. 총 48석의 학습 공간이 마련돼 있어 소수 인원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간을 이용한다.

‘원주 여성이 자신의 꿈과 만나는 곳’이라고 적힌 이 공간은 왜 원주 여성들에게 특별할까. 여기에는 이런 여성 공간을 간절히 원했던, 원주에서 나고 자란 성숙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난 16년간 삼성서울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 성숙은 다시 원주로 돌아와 가장 먼저 이 공간부터 열었다.

“열일곱에 결혼해 자식 넷을 낳아 키운 어머니의 삶도 그렇고 간호사로 일하며 제 일상을 몽땅 잃어버렸던 저도, 제 주변의 여성들을 보면서도 늘 생각했어요. 여성의 삶은 왜 이리 고될까. 간호사로 일하면서도 언젠가 꼭 여성을 돕는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첫 단계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 형제자매 모두 생활전선에 뛰어들 만큼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성숙은 담임선생님 설득으로 취업 걱정 없는 간호학 공부를 시작했다. 다행히 성적이 좋아 학비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시작된 삼성서울병원에서의 간호사 생활. 환자들에게 ‘여기 간호사는 열 의사보다 낫다’는 말을 들으며 동료들과 열심히 일했지만, 성숙에게는 자신을 잃어버린 시간이기도 했다. 간호사로 일한다는 건, 나 자신은 없어지고 간호사라는 역할만 남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서로 의지하며 지낸 동료들 덕에 성숙은 성인 및 소아 암병동, 암센터 외래진료 현장에서 관리직인 운영간호사 일까지 병행하며 후배들을 이끌었다.

“간호사는 업무 중 실수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잖아요.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뿐만 아니라 안에서는 ‘태움’이라 불리는 직장 내 괴롭힘, 밖에서는 환자에 의한 폭언과 폭행이 이어지죠. 무엇보다 노동 강도가 너무 세요. 근무시간에 병원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사고를 책임져야 하니까요.”

고단한 일상이 이어졌지만 언젠가 여성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성숙은 대학원에 입학해 여성정책 공부를 병행했다. 공부가 끝날 때쯤, 고향이 같은 남편이 말했다.

현장 간호사가 부족한 이유

“남은 생은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준 원주에서 일하며 지역사회에 기여하며 살자.”

당시 마흔을 앞두고 있던 성숙은 간호사가 아닌 새로운 일로 여성을 도울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두 자녀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사하면 그간 바빠서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좋은 기회였다.

그때부터 성숙은 여러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원주여성센터 설계도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도전이 W스터디센터를 만드는 것이었고, 두 번째 도전 과제는 ‘바른간호연구소’ 설립이었다. 원주로 돌아와 대학에서 기본간호학 강의를 맡았던 성숙은 법조인으로 일하는 남편의 사무소에서 여러 의료사고 사건을 접하게 됐다. 간호학을 공부하고 큰 병원에서 16년간 근무한 성숙에게 자연스레 교육 의뢰가 자주 들어왔다. 성숙은 환자를 진단·치료하는 임상 현장에서 경험한 사례를 바탕으로 병원, 간호사회 등에서 간호윤리 교육을 여러 차례 진행했다.

코로나19 대응 의료인력 기준이 없어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간호사 소식을 들을 때마다 성숙의 가슴은 무너져내린다. ‘코로나 영웅’이라는 타이틀 대신, 화장실조차 갈 수 없을 정도로 업무에 치이던 간호사가 옥상에서 몸을 던지기 전에 근무환경을 바꿨어야 했다. 성숙은 비단 간호사 수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간호 면허 소지자 수는 충분한데 실제 간호사로 일하는 비율이 낮은 게 문제다. 제대로 일할 수 없는 업무환경 때문에 일하지 못하는 이가 많은 것이다.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이 1 대 5인 미국처럼 법으로 관련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다.

공간 곳곳 세심하게 꾸민 W스터디센터를 둘러보고 나오며 성숙은 말했다. “이 공간을 간호사를 간호해주는 최초의 공간으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언제든지 들러 책 읽으며 공부하고 여러 교육 프로그램도 들을 수 있는 곳으로요. 간호사도 간호받을 공간이 필요해요.”

그가 구상하는 간호사를 간호하는 새 공간은 복합교육문화센터나 다름없다.

먼저 성숙은 간호사들이 언제나 이곳에 들러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전국의 주요 동네서점들을 방문하며 자료를 모으고 있다. 간호 업무에 관한 책은 물론, 쉬면서 읽으면 좋은 책도 비치할 계획이다. 책을 판매하는 작은 서점 공간이 될지, 비치된 책을 읽으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지는 여전히 고민이다.

송성숙씨가 원주에서 운영하는 ‘W스터디센터’ 내부.

송성숙씨가 원주에서 운영하는 ‘W스터디센터’ 내부.

‘엄마 역할’이란 압박 덜어주고파

공간 한편에선 간호사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예를 들어 월요일 오전에는 병원 취업을 준비하는 예비 간호사를 위한 영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식이다. 성숙이 생각하는 수업은 강사에 의해 진행되는 일방적인 수업 방식이 아니다. 토익 점수에 따라 초급부터 고급반까지 나누고, 점수에 맞는 교재를 선택해 함께 공부하는 ‘학습모임’이다. 교재 공부는 물론 서로 문제를 만들어서 시험문제를 내고, 각자 문제풀이도 맡는다.

이외에 병원별로 다른 취업준비반도 운영된다. 예를 들어 삼성병원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실제 합격한 선배들이 취업에 필요한 성적 관리, 영어 점수 준비, 삼성병원에서 시행하는 인증시험 관리, 면접 준비 등을 생생하게 가르쳐준다. 모든 프로그램은 꼭 원주에 사는 여성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와서 들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매일 오후 서너 시간 정도는 성숙이 센터에 머물며 상담을 맡을 생각이다. 간호사 취직을 준비하는 학생부터 간호사로 일하는 후배까지 상의하고 싶거나 상담받을 일이 있다면 선배로서 도와주고 싶은 게 성숙의 생각이다.

무엇보다 성숙은 아이 키우는 간호사 엄마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특별히 마련하고 싶다.

“보통 간호사로 일하는 엄마들이 정신없이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공포를 느끼거든요. 저도 그랬고요. 이 시점에 있는 엄마들이 간호계에서 보자면 제일 중요한 인재예요. 병원, 동료, 환자로부터 한창 인정받으며 일한 터라 자아효능감을 지닌 간호사들이거든요. 엄마 역할에 대한 압박으로 이들이 힘들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구체적으로는 아이들을 잘 키워낸 간호사 선배와의 멘토링 프로그램, 아이 교육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전문가 특강 등이 진행된다. 성숙은 “열악한 근무환경과 혹독한 노동 강도, 낮은 임금 때문에 평균 근무연수가 5.4년에 그치는 한국 간호사가 이 시점을 잘 넘기면 10년은 잘 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2010년, 다시 원주로 오면서 그가 구상했던 여성센터 그림은 이렇게 조금씩 완성되고 있다. 성숙이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인구수가 감소하는 강원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오히려 인구가 늘고 있는 원주시 변화가 뒷받침한다. 인구 35만 명이 사는 원주는 최근 교통망과 주거 여건이 발달하면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 한국은행 강원본부의 ‘강원지역 인구이동 및 인구구조 변화 분석’에 따르면 강원도 인구는 지난 5년간(2016∼2020년) 6667명 감소했지만, 원주에선 2만1400명이 증가했다. 원주 기업도시 내 학령인구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그저 일상을 책임져주는 선배

“간호사를 늘리고 관련법을 만들어 근무환경을 변화시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그저 일상을 책임져주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 그들의 일상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여기 선배가 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이에요.”

‘사는 동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성숙의 바람은 이미 지역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다섯 아이의 안전과 건강을 고민하다 독일의 쇠나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부모 모임을 통해 친환경 전기공급업체(EWS)를 설립한 여성, 우르줄라 슬라데크처럼 말이다.

성숙이 꾸려갈 전국 최초의 간호사를 위한 간호 공간이 기다려진다. 그로 인해 변화할 원주의 모습도 함께.

원주=글·사진 채혜원 객원기자·<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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