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지하철역이 가까워 대중교통이 수월한 ‘역세권’이나 슬리퍼 같은 가벼운 차림으로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주거권역을 일컫는 ‘슬세권’이 있다면, 경북 의성에는 ‘청세권’이 있다.
‘청세권’은 청년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한다. 청세권은 의성에 모인 청년들이 잘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청세권 협동조합’의 청년 조합원들이 지은 이름이기도 하다. 청세권 협동조합을 이끄는 배슬기(25) 대표는 과거에 여행 한번 와본 적 없는 경북 의성에서 1년7개월째 살고 있다. 수도권에서 나고 자란 그가 의성에 살게 된 것은 우연의 연속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경기도 광명으로 이사한 뒤로 쭉 그곳에서 살았다.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2018년부터 2년간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했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고됐지만 뿌듯했다. 다른 유치원에 비해 근무 조건도 좋았으나 좀더 주도적으로 나만의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이주에 큰 열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은 늘 있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광명을 벗어나면 다른 곳에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다른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은 어떨까, 그곳 집은 어떻게 생겼고 사는 사람들은 나와 어떻게 다를까.’ 그는 자주 생각했다.
여러 고민 끝에 슬기는 2020년을 스스로 안식년으로 정했다. 먼저 워킹홀리데이에 도전하기로 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 때문에 망설여졌다. 그러던 중 유치원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가 의성에서 진행하는 ‘청춘구 행복동’ 마을을 알려줬다.
청춘구 행복동은 의성군 안계면에 도시 청년들이 모여 사는 친환경 청년 공동체 마을로, 당시 10주간 의성에 살아보는 프로그램 1기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슬기에겐 소멸위험을 겪는 지역에서 농사일을 돕고 창업 관련 수업도 들으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좋은 기회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고, 200명 넘게 몰린 1기 지원자 중 최종 30명에 선정됐다.
“청춘구 행복동을 지원하기 전엔 의성이 정확히 어디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경상도 어디인가보다 하고 도착했죠. 기수마다 달라지는데 1기인 저는 ‘낭만농부’라 불리는 숙소에서 10주간 다른 청년들과 공동체 생활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경상북도, 의성군 등이 적극적인 지원 사업을 통해 청년 정착을 돕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의성군이 지원하는 청년사업 대상은 만 19살부터 45살 이하로, 현재 25~29살 청년층이 많은 편이다. 30~34살도 많다. 여러 지원 사업 덕에 인구는 조금씩 늘고 있다. 경상북도 자료에 따르면, 의성군 안계면은 2018년 순유입 인구가 적어 주민 수 자체가 31명 줄었다가 2020년에는 순유입 인구가 15명으로 늘었다.
의성 공동체 생활을 통해 슬기는 자신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 예를 들어 스스로 공동체 생활에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경험해보니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소리나 사람 움직임에 예민한 걸 몰랐다고 한다. 가족과 살 때 방을 혼자 썼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과 만나자마자 같이 생활하는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편하지 않은 점도 있었다. 당시 숙소가 2, 4, 6인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처음에 6인실에 배정받았다가 같이 지내던 동기의 양보 덕에 2인실로 옮기기도 했다.
낯선 곳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지만, 함께 지내는 청년들과의 관계가 무척 좋았다. 같이 지내는 하루하루가 색다르고 즐거웠다. 새로 시작한 일은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농촌진흥청에서 국가중요농업유산을 알리는 유튜브 콘텐츠 제작 일을 맡았고, 의성농촌관광협의회의 영상 작가 일도 시작했다. 일하면서 의성에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청년지원사업도 있으니 꿈꾸던 자신만의 사업을 해볼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다.
누군가 ‘앞으로 정착할 사람?’이라고 물어봤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겠지만, ‘여기서 조금 더 지내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물었을 때 슬기를 포함해 1기 참가자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10주간 같이 지낸 친구 중에 남자 2명, 여자 5명이 의성에서 계속 지내보기로 결정했다. 여성 청년 5명은 같이 지낼 집을 구했다. 월세 35만원인 30평대 집이었다.
정착에 필수요건은 일자리였다. 청춘구 행복동 1기 정착자들은 청년지원사업을 하는 조직에 계약직 직원으로 취업도 하고 의성군 지원금을 받아 창업을 시작했다. 의성 지역에서 받은 영감으로 생활예술용품을 만드는 ‘프로젝트 담다’, 체험형 농가 레스토랑인 ‘안사 우정국’ 모두 1기 정착자들의 창업 가게다.
하지만 의성 정착은 만만치 않았다. 대중교통이 없으면 이동 자체가 어려워 차가 필요했고, 문화 인프라가 적으니 주변 도시를 방문할 일이 잦았다. 무엇보다 슬기는 한집에 모였던 청년들이 각자 일로 흩어져 살면서 공동체 성격이 옅어지는 게 안타까웠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슬기와 청춘구 행복동 1, 2기 참가자들은 ‘협동조합’을 만들기로 했다.
“의성에서 같이 사는 게 즐거워서 남은 사람들끼리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직접 만들어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끈끈하게 관계를 이어주는 공동체가 필요하겠더라고요. 공적인 목표를 만들어야 같이 살아남을 수 있겠다고 결론이 난 거죠.”
‘청세권 협동조합’은 그렇게 2021년 1월 설립됐고, 조합원 추천으로 슬기가 대표직을 맡았다. 협동조합이 그해 가장 공들인 사업은 ‘잇는 살롱’이다. 도시보다 부족할 수밖에 없는 문화 환경을 인적 자원으로 대체하기 위해, 재능 있는 사람을 초대해 그가 지닌 문화를 나누는 네트워크 프로그램이다.
살롱 주제는 다양하게 넘쳐났다. 반려견에게 좋은 가족 되는 법, 행복한 안계면 산책법, 간단한 집수리 기술과 셀프 가드닝, 한 끼 나눠 먹으며 건강한 식문화 향유하기, 주거와 자산 관련 정보 배우기, 자투리천으로 가방 만들기 등 재밌는 살롱이 이어졌다. ‘잇는 살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통 프로그램을 통해 의성에 사는 청년 선주민과 새로 유입된 이주 청년 사이도 잇고 있다.
청세권 협동조합은 2022년에 20년간 버려져 있던 건물을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리모델링하는 ‘안계별장’ 공간 운영을 맡았다. 청춘구 행복동 프로그램을 만든 ‘메이드인피플’과 함께 운영할 이곳은 주민과 유입 청년들의 소통 공간이자 청년인구 지속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계획이다. 공간은 다양한 모임과 채식을 즐길 수 있는 1층 라운지, 2층 공유오피스, 3층 게스트하우스로 구성된다.
경북 의성에서 보낸 1년7개월. 어려움도 따르지만 의성 지역 살이에 대한 슬기의 애정만큼은 커지고 있다. 협동조합 일과 동시에 프리랜서로 영상작업을 이어가며 수입이 일정치는 않지만 온전히 하루하루를 계획해서 보낼 수 있는 일상이 좋다. 반려견 흑당이와 매일 조금씩 변하는 자연 풍경을 느긋이 즐기며 산책하고, 배울수록 재밌는 목공 등 여러 기술교육 수업에 참여한다. 2020년 11월 완공된 투룸 청년주택(보증금 100만원, 월세 26만원)에 입주하면서 거주도 안정됐다.
의성에 살면서 슬기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자신의 삶에 더욱 용기를 갖게 된 점이다. 다시 대학에 입학해 환경공학을 공부하고 싶어진 것도 그중 하나다. 그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의성에서 만난 청년들의 공통된 특징은 각자 용기를 지녔다는 점이다.
“많은 또래 친구가 지금 사는 영역을 벗어나 다른 삶을 꾸리는 것을 망설여요. 새로운 영역에 한 발 내딛는 걸 어려워하는 것 같고요. 저는 무언가 새로 시작하려는 시도 자체가 용기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만난 많은 청년이 각기 다른 이유로 의성에 왔지만 그 모습 자체가 도전적이고 용기 있어 보여요. 여기선 모두 저마다의 용기를 가지고 살 아요.”
청춘구 행복동을 소개하는 글을 읽다가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순례자>의 한 문장을 발견했다. 슬기 그리고 의성 역사를 새로 쓰는 청년들이 걸어가는 길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문장이었다.
‘비범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채혜원 객원기자·<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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