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시대, 샤이니, 트와이스, 투피엠(2PM), 엔시티(NCT), 세븐틴, 갓세븐 등 케이팝을 이끄는 수많은 그룹의 1500편에 이르는 뮤직비디오. 조용필, 이문세, 지드레곤, 지오디(god) 등 가수들의 콘서트. 이 모든 현장에 함께한 원순애(46) 촬영감독은 2000년 촬영팀 막내로 시작해 20년 넘게 한국 가요신에서 일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에게 쉼표는 없었다. 뮤직비디오 한 편을 밤새워 촬영해서 마치면, 그다음 날 바로 새로운 뮤직비디오 촬영이 시작됐다. 잠 못 자고 쉬지도 못한 채, 날이 바뀌면 콘셉트도 아티스트도 다른 현장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촬영해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한번은 야외 현장에서 72시간 동안 잠 못 자고 촬영하기도 했다. 이렇게 열흘을 연달아 일한 시간을 합치면, 사실상 한 달 정도를 하루도 못 쉬고 일한 셈이었다.
일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순애의 포트폴리오에 작품 목록은 늘어났지만, 작품 수가 적더라도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서 오래 일하는 감독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이런 생각이 들 때쯤 인디언 속담이 생각났어요. 인디언들이 함께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는데 한 인디언이 자꾸 멈춰 서서 자신이 달려온 곳을 응시하기에, 왜 자꾸 뒤를 돌아보느냐고 물었더니 그 인디언이 ‘내 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라고 답한 이야기요. 제가 그렇게 달려왔단 생각이 들었어요. 내 영혼을 돌보지 않은 채 달려왔구나 싶더라고요.”
우선 순애는 2011년 첨단영상대학원에 가서, 더 긴 호흡의 작품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매년 독립영화 한 작품씩 촬영을 맡았고, 분야를 넓히기 위해 <어색한 사이>란 작품을 연출했다. 2013년 디엠제트(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자, 이제 댄스타임> 촬영도 맡았다. 2014년에는 드라마와 예능 촬영도 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순애는 자신과 일에 대한 밀도를 높이기 위해 좀더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더욱이 현장에서 조금씩 늘어나는 여성 스태프를 볼 때마다 그는 ‘아, 내가 70살, 80살까지 촬영 현장에 남아 그들의 길잡이가 돼줘야겠구나’라고 다짐했다. 모든 후배가 순애를 보며 꿈을 키우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이 자리를 지켜야 더 많은 여성 후배가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애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여성 스태프 비율은 1~2% 정도였는데, 현재 순애가 체감하는 비율은 30%에 이른다. 물론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영화진흥위원회 2020년 영화산업 결산보고서 자료에 따르면, 국내 개봉한 작품 중 여성 촬영감독 비율은 8.8%에 머문다. 다른 스태프 비율인 감독(21.5%), 프로듀서(25.6%), 각본가(25.9%)와 비교해도 가장 낮은 수치다.
그는 길게 일할 수 있는 촬영감독 원순애가 되기 위해, 2017년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했다.
순애가 인구 21만 명의 소도시 강릉으로 간 건 사랑하는 여동생 가족이 사는 곳이기도 하고, 그의 고향이 강원도인 이유도 있다. 대관령 근처에서 나고 자란 순애는 바다, 산과 함께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서울이 꿈을 이뤄준 곳이라면, 평창은 그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해준 곳이다. 미디어를 접하기 어려웠던 평창의 작은 동네에서 순애가 카메라를 보고 반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서다.
“한창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어떤 분이 우리를 필름카메라로 찍고 있었어요. 주변이 조용하다보니 카메라 셔터 소리가 크게 들렸는데, 가슴이 뛰었어요. 내가 피사체가 되는 게 아니라 카메라 프레임에 뭔가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카메라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어요.”
카메라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촬영을 공부한 그는 이른바 ‘엠티브이(MTV·미국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 세대’다. 1995년 케이블방송이 시작된 뒤 엠넷(Mnet) 채널에서 MTV 음악 방송을 방영했고, 그는 감각적이고 화려한 뮤직비디오 영상에 매료됐다. 무엇보다 ‘지미집’이라는 카메라에 시선이 꽂혔다.
뮤직비디오 현장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순애는 무작정 인터넷에서 관련 일자리를 찾아봤고, 뮤직비디오 1세대 촬영감독인 김진우 감독이 지미집 카메라 촬영 직원을 구하는 공고를 발견했다. 그는 당시 거주하던 원주에서 무작정 서울에 있는 김진우 감독의 촬영 현장을 찾아갔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순애는 직접 감독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촬영 스태프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여러 걱정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밤샘 촬영이 당연시 여겨지는 때라 촬영 현장에 여성 스태프가 거의 없기도 했고, 카메라 촬영은 체력 때문에 여성이 하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래도 순애는 해보겠다고 했다. 꼭 이 현장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정확히 한 달 뒤 연락이 왔고, 순애는 달랑 여행용 가방 하나를 들고 서울에 도착했다. 그렇게 촬영 어시스턴트(보조)가 된 순애는, 7년 뒤 50~60명 되는 촬영팀을 이끄는 촬영감독이 됐다.
“장비를 다루려면 아무래도 체력이 중요하잖아요. 강릉에 와서는 촬영 횟수를 줄이고 좀더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노하우를 기르고 있어요. 몸이 허락하는 한 할머니가 돼서도 쭉 촬영하고 싶어 이주했으니까요. 강릉에 오고 나서 고민이 깊어졌고 하나의 피사체를 찍을 때도 더 애정이 담기는 기분이에요.”
그는 강릉에서 30년 지기와 함께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 직업 관련 강의를 다니는 친구와 일정을 맞춰 친구가 일하는 날은 순애가, 순애가 촬영하는 날은 친구가 카페를 지킨다. 처음부터 카페 문을 열 생각은 아니었다. 둘 다 작업실이 필요했고 그게 카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 마침 월 30만원 임대료의 공간을 얻게 됐다. 강릉의 한적한 동네라 가능한 임대료였다. 순애는 “카페를 4년 넘게 공동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임대료에 대한 큰 스트레스 없이 각자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카페 이름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서 깊은 카페 이름을 따서 ‘카페 드 플로르’라고 지었다. 20세기 프랑스 지성인과 예술가, 정치인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교류했다는 그 카페처럼, 강릉의 작은 동네에서 각자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바람에서다.
매주 화요일 강릉에 있는 대학에서 드론 촬영과 편집을 가르치는 순애는 2021년 12월 말부터 넷플릭스 드라마 촬영에 들어간다. 촬영이 시작되면 일주일 중 절반은 서울에 머물며 촬영하고, 쉬는 날은 다시 강릉에 와서 카페를 지킬 계획이다. 이전보다 도로 상황이 나아졌고 KTX 열차도 있어 서울~강릉 이동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강릉에서 보낸 4년의 시간. 순애에게는 이전과 다른, 인생의 편집점이 생겼다.
“영상편집에서 컷을 나누는 지점을 편집점이라고 하거든요. 저는 일과 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편집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서울에서는 모든 편집점이 단면으로 날카롭게 잘린 느낌이었다면, 강릉에서는 그 편집점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보여요. 무언가 겹겹이 쌓인 편집점에서 저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을 얻었어요.”
순애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금 카페에 깜짝 손님이 와 있다고 귀띔했다. <불펜의 시간>을 쓴 김유원 작가다. 그의 본명은 손경화 다큐멘터리 감독, 순애의 오랜 벗인데 얼마 전엔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의 강유가람 감독과도 산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동해와 삼척에 걸쳐 있는 두타산의 40년 만에 개방된 등산로를 함께 올랐다고.
여성 창작자의 강릉 아지트분야는 다르지만 카메라를 든 여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니, ‘카페 드 플로르’가 각계각층에서 작품을 만드는 여성 창작자들의 강릉 아지트로 보였다. 전국 곳곳에 이런 공간이 많아지면, 여성 예술가들이 서로에게 쉼표를 선물하며 오래, 함께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바깥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수록, 미래를 향한 즐거운 상상은 현실이 되어간다.
강릉=채혜원 객원기자·<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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