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슬프고 아픈 것 말고 기쁘고 좋은 것

지리산에 페미니스트가 모여 산다, 젠더교육 강사·타로 상담자 유진
등록 2021-10-14 14:16 수정 2021-10-15 02:22
남원시청 근처에 있는 북카페 겸 서점 ‘살롱드마고’를 공동운영하는 유진.

남원시청 근처에 있는 북카페 겸 서점 ‘살롱드마고’를 공동운영하는 유진.

지리산 어딘가에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2015년 즈음이다. 그곳에는 여성 창작공간이 있고, 여성들이 모여 지역 독립잡지를 만든다고 했다. 실상사라는 절에서 음악회도 열고 타로 상담과 꿈 분석 워크숍 등 재미나고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린다고.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이라는 동네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젠더교육 강사와 타로 상담자로 활동 중인 이유진(39)이 있다.

퀴어 퍼레이드도 열리는 지리산

유진이 산내면에 처음 도착한 건 2013년 초겨울이다. 친구 이리의 추천으로 산내면으로 이주한 유진은 도착하자마자 생계를 꾸려야 했으므로 마을 사업하는 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산내면은 외지인이 25%에 이르고, 마을 동아리가 100개가 넘을 정도로 다른 농촌 마을과 달랐다. 주민들이 공동체 활동에 적극적이고 청년 중심으로 퀴어 퍼레이드 ‘산내 성다양성 축제’도 열린다.

무엇보다 젊은 여성이 많았다. 유진은 여기라면 늘 관심 있던 여성문화기획 일을 해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문화기획달’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제 별칭인 ‘달리’의 ‘달’을 따서 여성주의 문화단체 ‘문화기획달’을 만들었어요. 2014년에는 혼자 일했고, 저에게 산내면 이주를 권한 친구인 이리, 자정과 2015년 가을부터 같이 일했고요. 그 덕에 비수도권 농촌지역에서 페미니즘 운동과 다양한 문화예술 교육을 통해 새 문화를 만들 수 있었어요.”

‘문화기획달’은 지역 독립계간지 <지글스>(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를 창간해 청소년, 농업인, 교사,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업군과 연령층의 여성들과 함께 총 16번 계간지를 펴냈다. 2015년에는 지리산 여성창작공간인 ‘살롱드마고’를 열었고 독립출판여성 지리산 네트워크 파티, 채식 음악회 등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참여하는 주민이 많아지면서 마을 남성들의 페미니즘 모임인 ‘산내페친’도 만들어졌다.

유진은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나아가기 위해 활동가를 중심으로 ‘협동조합 마고’를 꾸렸다. ‘살롱드마고’(www.instagram.com/salon_mago)는 2020년 11월, 남원 시내로 이사하면서 북카페 겸 서점으로 바뀌었다. 남원시청 근처에 위치한 이곳은 남원의 페미니즘 문화지구나 다름없다. 책장은 다양한 주제의 페미니즘 책으로 가득 차 있고, 마고에서 직접 만든 다정한 노트와 디자인 상품이 인기리에 판매 중이다.

지리산 자락 마고 여신의 생명력과 사랑이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는 여성과 몸 다양성을 주제로 한 미술공예 프로그램, 한국 여성영화 각본집 읽기 모임 등 즐거운 작당 모임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 유진이 타로 초심자와 상담자를 위해 여는 워크숍은 인기가 많다. 그가 타로를 활용해 학교를 포함한 여러 현장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이나 관련 문화예술 교육, 치유 작업 경험을 나누는 자리다. 유진은 여러 여성이 각자 영역에서 타로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즐거운 여행을 떠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꾸준히 워크숍을 열고 있다.

‘살롱드마고’ 내부 모습.

‘살롱드마고’ 내부 모습.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마을

남원 산내면에 자리를 잡기까지 유진은 여러 번 이주했다. 전북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유진은 고향을 떠나는 것이 10대 목표일 만큼 고향에서 사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정확히는 지역 소도시의 ‘유사 가족’ 문화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일가친척이 가까이 사는 것도, 집 밖으로 나가면 모든 사람에게 인사해야 할 정도로 온통 아는 사람뿐인 것도 유진에겐 숨 막히는 문화였다. 그 때문일까. 유진은 전라도에 살면서도 사투리가 입에 붙은 적이 없고, 지금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그의 이주 경로를 보면, 그가 익명성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곳을 계속 찾아다녔음을 알 수 있다. 19살에 고향을 떠나 대학 재수 공부를 서울에서 했고, 대학은 강원도 춘천으로 갔다. 졸업 후 첫 직장은 제주에 있는 반성매매 단체였다. 이후 다시 서울과 강원도 평창에서 일했다. 평창에서 일하던 중 파트너를 만났고, 자급자족하며 같이 살 수 있는 지역을 찾다가 경기도 이천으로 옮겼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일은 짐작보다 더 어려웠다. 생계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모은 돈을 비닐하우스 짓는 데 몽땅 투자했는데, 재해로 비닐하우스가 하룻밤 사이 모두 사라지는 일도 겪었다. 계획했던 자급자족 귀농생활과 점점 멀어지고 있을 때쯤 산내면을 만났고, 유진은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한 마을에서 살고 있다. 지리산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빈집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집값이 연세(1년치 월세) 60만원이었다. 오래된 집이라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유진은 그 집에서 4년을 살았다.

유진은 가끔 사람들이 왜 농촌으로 이주했는지 물으면 무어라 답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많은 사람이 도시의 삶에 회의를 느끼거나, 생태주의적 삶을 원해 귀농이나 귀촌을 택할지 몰라도 그는 그저 갈 곳이 없어서 갔을 뿐이다.

“일 때문에 서울에 살기도 했지만, 저는 삶의 대부분을 지역에서 살았잖아요. 그래서인지 수도권 밖에서의 삶이 그렇게 특별하게 여겨지진 않거든요. 신기하게도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사는 분들이 제 이야기나 협동조합 마고, 살롱드마고에 관심이 많고 특별하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웃음)

생각조차 못했던 젠더교육강사 되다

살롱드마고 공동운영자인 유진은 젠더교육 강사이기도 하다. 긴 시간 여성 영역에서 일한 그이지만 젠더교육 일을 할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반성매매 단체에서 청소년 상담을 지원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연히 몇몇 학생에게 타로카드 상담을 한 게 계기가 됐다. 유진에게 타로 상담 수업을 맡긴 학교가 점점 많아졌고, 어느새 그는 지리산 부근 수십 곳의 중·고등학교 방과후 교사가 됐다. 그러던 중 지인에 의한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여학생들을 만나게 됐다.

“피해 학생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피해자와 그의 부모 모두 어떤 대응도 원치 않았어요. 그저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지나가기를 바랐죠. 지역 주민 사이에는 이런 일이 알려지면 ‘피해자만 손해’란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요.”

“저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피해 학생들 앞에서 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 잘못된 줄 알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피해자에 대한 미안함, 지역사회에 성폭력이 재발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괴로워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전주와 서울에서 진행되는 성/젠더 교육 강사 과정에 바로 참여했고, 이후 학교와 공공기관 등에서 폭력 예방교육과 성/젠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유진과 동료들은 지역 페미니즘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2018년 산내면에서 가까운 함양고등학교 ‘스쿨 미투’ 이후 학내 페미니즘 교육을 일방적으로 취소했을 때, 문화기획달은 전국 여성단체와 ‘함양고 학내 미투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민원을 제기했다. 2021년 여름, 남원에서 남자 중학생 11명에 의한 불법촬영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안전하고 성평등한 지역사회를 위한 시민연대를 조직해 펼침막 캠페인을 벌였다. 피해자들의 일상 회복을 위한 일이었다.

결과는 안타까웠다. 함양고 여학생들이 교사들의 성차별·성희롱 발언을 폭로하고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지만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나 징계는 없었다. 불법촬영 사건에 대해서도 지역사회는 놀라울 만큼 침묵했다. 유진은 ‘유사 가족’ 문화로 꽁꽁 싸매어 있던 고향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한국 지역사회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어렸을 때처럼 혼자가 아니다.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같은 목소리를 내는 동료들과 수많은 지역 시민, 단체가 곁에 있다.

변화가 새로운 길을 내다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뒤 갈 곳이 없어 이주가 이어졌던 유진에게, 길을 잃고 헤매던 날에 빛이 되어준 건 ‘페미니즘’과 ‘글쓰기’였다. 인생의 거의 전부를 아토피피부염 중증 환자로 살아왔고, 우울증과 자살 충동으로 20대부터 심리 상담을 받은 유진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삶을 한 움큼이나마 손에 쥘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줬다.

7년 전 이웃 여성들과 <지글스>를 만든 것도, 지금 글쓰기 모임 ‘빛날’ 멤버들과 함께하는 것도 글쓰기를 향한 유진의 간절한 바람에서 시도됐다. 이들은 살다가 넘어질 때마다 유진을 일으켜 세워줬고, 자신을 놓지 않은 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되었다. 유진의 글은 차곡차곡 쌓여 2021년 8월,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다른길)로 출간됐다. 지금은 생생한 젠더교육 현장 이야기를 담은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다.

유진은 지난해 유난히 춥고 힘든 겨울을 보냈다고 책에 적었다. 매일 온몸의 통증과 함께 아침을 맞아야 했지만, 이제 그는 슬프고 아픈 것 말고 기쁘고 좋은 것을 발견하고 돌보려 노력한다. 제일 좋아하는 ‘카페 제비’에 가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단골식당 ‘팟’에 그린 카레를 먹으러 간다. 소중히 가꾼 일터에는 서로 배려하며 함께 걸어온 동료들이 있고, 매일 밤 “잘 자”라고 인사하며 따스하게 안아주는 파트너 혜상과 반려견 네오가 있다.

유진이 품은 용기와 희망, 사랑은 지리산 자락부터 남원 시내로 유유히 번지고 있다. 그 길에 함께하는 이들이 변화가 더딘 지역에 새로운 길을 낸다. 남원 곳곳을 걸으며 그 희망과 사랑이 만들어낸, 수많은 길을 보았다.

남원=글·사진 채혜원 객원기자·<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