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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 사는 사람

진심으로 좋아서 선택한 것만 남기자

이주 다음은 비건 다음은 지역화폐… 소외되지 않고
먹고살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나의 슬픔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다

제1372호
등록 : 2021-07-17 16:57 수정 : 2021-07-2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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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이 충주댐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다. 경선 제공

잘 살아보려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전으로 이주한 건 아니었다. ‘얼마 되진 않아도 가진 돈 다 쓰고 죽자.’ 이판사판 심정이었다. 여기저기서 7년간 이어온 직장생활을 끝낸 경선의 당시 나이는 서른하나. 경기도 안산 출신인 경선은 안산이 싫었다. 수도권에 살면서 겪는 ‘당연한 서울 동경’도 지겨웠고, 일자리를 얻고 사람들 사이에서 매일 이어온 인정투쟁에 지쳐가고 있었다. 대학 시절 4년 넘게 전라북도에 거주했지만, 정착지가 되진 못했다. 다시 안산으로 돌아왔다.

칼퇴근, 주5일이 완벽한 자유이던 때
경선은 한때 ‘칼퇴근’과 주5일제 근무가 완벽한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걸 이뤄낸 자신이 자랑스러워 소셜미디어 계정에 자주 떠벌렸다. 그 행위에서 성취를 느끼는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여주는 일상에 더욱 집착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보여줄 게 없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듯해 멈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경선은 생각했다.

‘그동안 내 선택이 진실했다면 나는 왜 우울을 얻었을까. 지금부터라도 내 삶에 진심으로 좋아서 선택한 것만 남기자.’

이 과정에서 경선은 자연스레 ‘이주’를 선택했다. 대한민국 지도를 펼쳐놓고 어디에 가면 소외되지 않고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을지 찾았다. 직접 답사도 다녔는데, 어느 날 대전 하천가에 앉아 노을 풍경을 바라보다 ‘여기 정도면 살아볼 수 있겠다’ 싶었다.

매월 28만원을 내는 대전 셋방에 도착한 경선의 일상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됐다. 불안했지만, 본인의 선택으로만 이뤄진 작은 방에서 눈떴을 때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과 달리, 매일매일 내 시간을 선택할 수 있었다. 행복한 척 또는 슬픈 척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한편으로 경선은 막상 도망치고 나니 한동안 자신이 찼던 족쇄를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는 해방감에 펑펑 운 날도 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실체를 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경선은 자신이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사람들의 출근 소리를 들으며 ‘오늘 뭐 하지’ ‘나를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 생각했어요. 직장생활하며 거의 매일 쓴 일기를 모으고 나니 1500편쯤 되더라고요. 우선 나를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글을 쓰자 마음먹었어요.”

그러나 희망 찾기는 쉽지 않았다. 혼자 지내다보니 영양 상태를 잘 챙기지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며 운동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색이 하얗게 변하고, 피부도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몸이 망가지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경선에게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힘든 시기였다.

그러던 중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대주택에 들어가면서 월세 부담이 4만2천원으로 줄었고, 몸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경선은 도수 치료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어떤 것에서 해방되지 못한 마음이 몸을 괴롭히고 있어요. 지금 살아 있는 이 시간, 당신이 먹는 일에 에너지를 쓰세요.” 그날 경선은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이곳이 서울이라면 어땠을까. 선택했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결국 이전과 비슷하게 살지 않았을까. 화초를 키우려면 분갈이가 중요하듯 우리 삶도 변화가 필요하다. 자라는 만큼, 변하는 만큼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한다. 그 변화의 기준은 오롯이 내가 만든다.’

좋은 선택이 더 좋은 선택지를
대전으로 이주한 지 2년째 되던 2019년, 경선에게 이주만큼이나 중요한 변화가 찾아온다. 고기는 물론 동물성 성분까지 먹지 않는 비건(완전 채식주의자)이 된 것이다.

그 시작점엔 반려견의 죽음이 있었다. 경선은 그 죽음에서 벗어나는 게 어려워 대전에서 유기견 봉사를 계속 다녔다. 그러던 중 친구 반려견이 면역질환에 걸려 생명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다. 잿빛이 돼가는 한 생명을 보면서 붉은 고기를 더는 먹을 수 없게 됐다. 그때만 해도 고기 정도 먹지 않을 생각이었다. 커피도 라테만 마셨는데 우유까지 끊는 건 생각조차 못해본 경선이었다.

6개월이 지나 제주 책방 풀무질을 방문했을 때 전염병에 의한 동물 살처분 매몰지를 기록한 책인 <묻다>를 읽은 게 비건이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대전으로 이주, 이후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된 경선에게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러운 변화였다고 한다.

“당시 중년 남성이 축산업 일을 하다 살처분 비극을 겪고 지쳐서 다른 업종에 면접 보러 가는 장면을 소설로 쓰고 있었거든요. 그 남자 대사를 쓰려고 살처분 관련 자료를 찾다보니 동물권, 인권, 에너지 관련 공부까지 하게 됐어요. 그저 내 상처 이겨내보자고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다른 삶의 방식을 마주하게 된 거죠. 좋은 선택이 더 좋은 선택지를 주었어요.”

철저히 자신의 슬픔에 매몰돼 살던 경선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 삶의 우선순위를 ‘새로운 사람 만나기’로 고쳐두었다. 이주 뒤 친구 한 명 없는 곳에서 자신과 맞는 커뮤니티를 찾아가는 일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비건’을 키워드로 여러 정보를 검색하던 중, 대전·충청 채식인 모임 ‘아삭아삭’을 발견했다.

대전으로 이주할 때 ‘가진 돈 다 쓰고 죽자’던 경선의 비관적인 결심은, 비건 친구들을 만나고 나서 ‘잘 살고 싶다’로 변화했다. 처음엔 비건 소식을 접하고 정보 교환 활동을 했지만, 그곳에서 경선은 자신에게 여러 깨달음을 주는 친구들을 만났다. 아삭아삭 회원들은 위계 서열 없이 나이, 이름을 묻지 않은 채 서로를 존중하며 지낸다. 무엇보다 아무 조건 없이 베풀고 나누는 모습에 경선은 따스함을 느꼈다. 누구 하나라도 한국보다 비건 식품과 제품이 다양한 외국에 다녀오면 두 손 가득히 싸온 선물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이 모임에서 경선은 지역화폐로 회원들이 노동과 물품을 거래하는 품앗이 ‘한밭레츠’의 오민우 대표를 만나 자신의 세상을 한 뼘 더 넓혔다. 예를 들어 지역화폐 단위가 ‘두루’인데 ‘뜨개질 배울 사람 5천 두루’라고 공고가 올라온다. 참여자들은 뜨개질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모임 모집자에게 5천 두루를 낸다. 모집자는 그 지역화폐로 뜨개질 수업 재료와 같이 자신에게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다.

“지역화폐를 쓰며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내 효용성을 찾은 것 같아 기뻤어요. 예전에는 할 줄 아는 게 글쓰기밖에 없었는데 문학상 응모에서 떨어질 때마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같이 느껴졌거든요. 좌절감만 쌓이고요. 그런데 비건이 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풀뿌리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대전 대덕구에 위치한 에너지전환 ‘해유’ 사회적협동조합에서 경선은 마케팅과 디자인 업무를 맡고 있다. 경선 제공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기회’
실제 경선은 대전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다. 사회적협동조합 혁신청에서 운영하는 ‘비긴앤비건 챌린지’에 함께하고 있다. 100일 동안 시민 100명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채식 정보를 모으고 기록, 공유하며 즐거운 채식 문화를 만들어가는 활동이다. 채식 제과점이나 레스토랑 정보 등이 담긴 채식 아카이빙(기록 파일 저장), 채식 재료를 공유하고 기록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비건 상점 백과사전 제작 등이 그 예다. 2020년에는 채식 레시피(요리법) 책을 발간했다. 대덕구 지원으로 복날 생명을 지키는 채식 밥상을 차려 나눠 먹는 행사도 진행했다. 지금 경선은 소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모임인 아삭아삭 대표가 됐고, 에너지전환 ‘해유’ 사회적협동조합에서 마케팅과 디자인 업무를 하고 있다.

비건이 되고 나서 경선은 그 어떤 생명도 착취하거나 죽이지 않고 무해함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만나, 나눔에서 오는 행복을 얻었다. 본인 생각이나 의견을 드러냈을 때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그들 속에서 그는 이제 더 많은 사람과 풍요로운 관계 맺기를 꿈꾼다.

2020년 겨울에는 더 윤리적이고 지속가능한 생활을 함께 고민해주는 인생 동반자를 만나 충북 충주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대전에서는 비건이 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연결 지어 만났다면, 충주에서는 완전한 비건이 되고 나서 사회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곳에서의 내 삶은 어떻게 펼쳐질까.’ 경선은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여전히 대전과 이어진 일을 많이 하지만, 충주에서도 여러 연결망을 만들고 있다. 한살림 조합원과 환경 소모임을 하고, 모모학교라는 청소년 지원 단체에서 청소년 환경동아리 ‘이끔이’를 맡고 있다. 좀더 친환경적이고 비건을 지향하는 단체를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지역에는 기회가 많이 있어요.”

경선이 인터뷰 도중 한 말이다. 흔히 지역보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더 많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몸소 체험한 경선의 생각은 다르다. 도시에서는 사람 눈을 마주치고 천천히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이곳에선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과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 사람을 통해 물품을 직접 사고파는 관계에서 느끼는 정서적 만족감이 크다. 경선의 말은 결국 사람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 덕분에 그는 최고가 아니어도 유일무이한 존재로 사는 게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사람들 덕분에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
이제 경선은 과거와 달리 일상을 전시하는 계정이 아닌, 더 많은 비건과 소통하고 정보를 나누는 ‘비건 계정’을 운영 중이다(www.instagram.com/vegan.kyeongseon). 비건으로 먹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직접 쓴 글과 그린 그림으로 흥미롭게 담아내고 있다. 여러 환경 정보도 많다.

안산을 시작으로 익산과 전주, 대전과 충주로 이어진 이주 과정에서 경선은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고 더불어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활동가가 됐다. 충주댐을 배경으로 행복한 웃음을 짓는 경선을 보니, 새로 산 일기장 맨 앞 장에 적어놓은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를 구하는 건, 스스로에게 들려줄 수 있는 다르게 사는 방법의 이야기다.”(제사 크리스핀, <죽은 숙녀들의 사회>, 창비, 2018년)

채혜원 객원기자·<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역으로 가서 지역살림을 꾸리고 공동체에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바깥에서, 길 위에서 그들이 전하는 희망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칼럼 제목은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2013년) 수록작에서 따왔습니다. 4주에 한 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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