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국제당)은 가맹지부에 문제가 생기면 결정서를 채택하곤 했다. 조선지부에 대해서도 그랬다. 1927년 4월29일자 조선문제결정서도 그중 하나다.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 대표자 김철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서 국제당 외교를 승리로 이끈 결과였다. 당권이 제2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에 있음을 인정한 중요한 문서였다.
이 문서에는 차기 대회를 국제당 대표의 입회하에 열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국제당 집행위원회 대표가 참가”해 가까운 장래에 조선공산당 대회를 소집하되,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대의원을 선출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1 조선공산당의 조직 내 단결이 불충분하고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이 불완전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국제당 특사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국제당 특사가 찾아온다? 가혹한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조선 현지에서 외국인이 참석하는 당대회 개최가 과연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다. 파란 눈의 외국인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결정이었다.
두 달 뒤 대표가 확정됐다. “조선공산당대회 준비를 위해 존 페퍼(John Pepper) 동무를 코민테른 대표로서 조선당에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2 국제당 최고위 집행기구인 간부회가 내린 권위 있는 결정이었다.
존 페퍼는 누군가. 그는 헝가리 사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대혁명의 파도가 전 유럽에 휘몰아칠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폐허에서 혁명을 이끌던 요제프 포가니(1886~1938)였다. 그는 유명한 벨라 쿤과 더불어 1919년 3~7월에 고조된 헝가리 혁명의 주요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단명했지만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의 요직도 맡았다. 국방인민위원, 외무인민위원부 차관, 교육인민위원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해 8월1일 군부의 정변으로 혁명정부가 전복되자, 소비에트러시아로 피신한 이래 평생토록 해외에서 떠도는 망명자가 됐다.
국제당은 망명자들에게 훌륭한 활동 무대가 됐다. 페퍼는 1921년 독일공산당의 혁명 봉기를 돕기 위해 독일로 파견됐다. 독일 ‘3월 행동’이 실패한 뒤 모스크바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그의 해외 편력은 계속됐다. 1922년 7월에는 미국으로 갔다. 미국공산당 내 헝가리계 당원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존 페퍼란 이름은 바로 이 시기에 사용하던 필명이었다. 그곳에서 페퍼는 출중한 활동력을 발휘해, 당내 유력한 지도자 그룹의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1925년 모스크바로 소환된 페퍼는 국제당 각급 기구의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국제당 집행위 비서부와 조직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됐고, 선전선동국장에 임명됐다. 그때부터 페퍼는 국제당 내에서 전천후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같은 시기에 국제당 주재 미국공산당 대표부를 이끌었고, 국제당 영국 비서부 비서로도 재직했다. 전세계 영어사용권 지역의 모든 문제에 의견을 피력하는 입장에 섰다.
페퍼는 부끄러움 모르는 기회주의자라는 악명도 얻었다. 이전까지 그는 국제당 의장 지노비예프의 후원을 받아온 측근이었다. 모스크바로 망명한 뒤 줄곧 그랬다. 하지만 당시 진행하던 권력투쟁에서 스탈린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한 페퍼는 정치적 생존과 미래의 성공을 위해 옛 동료를 기꺼이 버리기로 결심했다.3 1926년 여름 <더 데일리 워커>(The Daily Worker)에 지노비예프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게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27년 9월 국제당집행위 회의에서 트로츠키를 규탄하는 주요 연설자로 등단하기도 했다. 페퍼가 조선 문제에 대한 국제당 특사로 임명된 것은 이 시점에서였다.
1927년 11월7일을 며칠 앞둔 때, 페퍼는 일본 고베항에 도착했다. 러시아혁명 8주년 기념일이 코앞이었다. 경찰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혁명을 찬양하는 군중집회와 시위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경찰력을 총동원했다.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경찰이 다가왔다. 일본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일본에 친구가 있느냐, 과거에 일본에 와본 적이 있느냐, 얼마나 오래 체류할 것이냐 등을 물었다. 페퍼는 자신을 <AP> 통신 베를린 지국에서 파견한 캐나다인 기자라고 했다. 도쿄지국에 보내는 추천서와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관헌으로부터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취재차 일본 출장길에 오른 언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를 미행하는 감시인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럽인이 비합법적 업무를 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페퍼가 보기에, 일본 최대 도시인 도쿄는 당시 인구가 200만 명이었지만 유럽인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은 2곳밖에 없었다. 페퍼는 그중에서 ‘임페리얼호텔’에 투숙했다. 바로 ‘일본의 영빈관’이라는 데이코쿠(帝國)호텔이다. 이처럼 값비싼 최고급 호텔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페퍼는 “나는 좀더 저렴한 룸을 구하려 노력했지만, 모두 차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변명했다.4 국제당의 적잖은 공적 자금을 쓰는 처지라 윤리적으로 부담을 느꼈던 듯하다.
페퍼의 첫 과업은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집행부와 접촉하는 것이었다. 그가 시도한 방법은 일본에서 간행되는 조선어 신문 <대중신문>을 통하는 길이었다. <대중신문>은 조선공산당의 재일본 합법 기관지였다. 그가 가진 것은 그 신문사 주소뿐이었다. 과연 그를 통해 비밀결사 지도부와 연락할 수 있을까? 다행이었다. 페퍼는 서울의 비밀결사 집행부와 교신하는 데 성공했다.5
페퍼는 만남 장소로 도쿄를 희망했다. 조선공산당 집행부 구성원들더러 도쿄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5명으로 구성됐다. 양명(梁明), 김세연(金世淵), 최익한(崔益翰), 최창익(崔昌益), 김영식(金泳植)이다.6 그들이 한꺼번에 경성을 떠나 도쿄로 이동하는 건 부자연스럽고 위험한 일이었다. 왜 이처럼 무리한 일을 요청했을까? 아마 페퍼는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비밀 회합을 하는 데 경성보다는 도쿄가 훨씬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페퍼는 오래 기다려야 했다. 처음 예상한 것 이상으로 길었노라고 뒷날 회고했다. “그들의 도쿄 여행 일정은 거의 2주일이 소요됐습니다. 보통 서울에서 도쿄로 가는 여정은 이틀 이상 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여행에 2주일이 걸렸습니다.”
회합이 성사된 때는 12월 초쯤이었던 것 같다. 도쿄 시내의 유럽식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페퍼는 도쿄에 있는 한 대학의 유럽인 교수로 꾸몄고, 조선인들은 도쿄를 떠나는 교수를 환송하는 대학생들로 위장했다. 환송연 장소에는 조선인 8명이 참석했다. 이 중 4명은 경성에서 온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었다. 나머지 4명은 아마 같은 당 일본총국 간부였을 것이다. 참석자들은 새 넥타이나 모자 같은 것을 부랴부랴 장만해야 했다. 외국인 교수에게 고급스러운 환송연을 베풀 수 있는 유족한 학생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에 유럽인 위한 호텔은 단 하나의안은 제3차 당대회 준비에 관한 것이었다. 어디서 대회를 열 것인가? 페퍼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나 중국 상하이에서 대회를 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조선 동무들은 조선 내에서 대회를 열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 해외 개최론은 위험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13개 도와 2개 해외총국의 대의원들이 대거 해외로 이동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페퍼는 결국 조선 동무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다음 논점은 페퍼의 대회 참석 여부였다. 페퍼는 조선 내지에서 열리는 당대회라면 불참하겠다고 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조선인 동료를 위험에 빠뜨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페퍼는 당대회에서 사용할 문서 네 종류를 제공했다. ①당대회 소집 원칙 ②행동강령 ③조직 문제 결의안 ④정치 문제 결의안이다. 페퍼는 이 문서들이 당대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페퍼가 조선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건 아니다. 그가 최종 목적지인 경성에 도착한 때는 12월10일 즈음이었다. 그의 소견으로, 경성은 ‘커다란 농촌’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인을 위한 호텔은 단 하나밖에 없고, 외국인이 경성에 도착하면 그것은 곧 사건이 될 정도였다. 자신과 같은 유럽인이 비밀활동을 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곳이었다. 경성에 도착해, 페퍼가 처음 외출한 곳은 조선총독부 청사였다. 거기서 문헌, 음악, 민속, 경제 사정 등에 관한 정보를 물었다. 정치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페퍼가 <AP> 통신 기자를 자임했음에 유의하자. 그는 취재를 위해 경성에 찾아온 언론인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페퍼는 단 한 사람의 조선인 동료도 만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과 연결을 맺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머지않아 페퍼는 조선을 떠났다. 중국 상하이를 경유해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이듬해 1월21일 모스크바에서 평가 모임이 열렸다. 페퍼의 조선 출장 보고를 듣기 위해 국제당 영미비서부 회합이 열린 것이다. 당시 조선 업무는 일본과 더불어 영미비서부 소관으로 편제돼 있었다.
페퍼는 방어하는 데 노력했다. 자기 역할이 소극적이었다거나 실패했다고 보는 듯한 주위의 시선에 맞섰다. 그는 모스크바에선 조선에 관한 최신의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움을 지적했다. 국제당이 이용할 수 있는 정보는 낡아서 실제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했다. 하지만 자기뿐만이 아니었다. 그 점에 관한 한 국제당의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우리의 결함들 중 하나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들에 관해 가끔 어떤 방침을 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뼈아픈 지적이었다. 페퍼는 유럽인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한 국제당의 결정이 애초에 무리였음을 시사했다. 조선 내에서 열리는 당대회에 참석하는 건 어떤 백인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페퍼의 체험담은 흥미롭다. 실패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대목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실패 원인에 대한 토로는 경청할 만하다. 국제당의 현실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1. 김철수·김강 번역, ‘고려 문제에 관한 결정서’(1927년 4월29일의 결정), 2쪽, РГАСПИ ф.495 оп.45 д.13 л.113об
2. Minutes of the Korean Commission, РГАСПИ ф.495 оп.45 д.13 л.129, 1927. 6.28.
3. Sakmyster, Thomas L., A Communist Odyssey: The Life of József Pogány/John Pepper. Budapest and New York: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pp.136~144, 2012.
4. Report of Comrade Pepper to the Bureau of the Anglo-American Secretariat, p.6, 1928. 1.2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10~27
5. Sen Katayama, On the Korean Communist Party Problem, p.2, 1928. 2.29.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116~119
6. ‘중앙집행위원회 보고, 제1호’ 3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6 л.69~74о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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