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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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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시인의 22년만의 시집 <악의 평범성>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
등록 2021-02-14 01:13 수정 2021-02-19 08:08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 오늘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이산하, 시집 <한라산> 서시 중에서)

군부 독재 시절이던 1987년 3월, 한 편의 서사시가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4·3 제주 항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외치고 군경의 참혹한 양민학살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한라산’. 시에는 ‘불온’ 딱지가 붙었고, 시인은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렀다. 한동안 펜이 꺾였던 시인 이산하는 12년 뒤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를 발표했으나, 다시 오랫동안 침묵했다. 안으로 더욱 단단하고 깊어지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벼린 22년이 지나,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악의 평범성>(창비 펴냄)을 내놨다.

시인은 “약 40년이나 시를 썼지만/ 아직도 내 언어의 날에는 푸른빛이 어리지 않았다”(‘푸른빛’ 중에서)고 했다. 그러나 직설과 은유가 교차하는 이번 시들도 여전히 시퍼런 날이 섰으되, 행간의 사유가 뭉근하고 정직해서 더 아리다.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럽게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 / 이 세상의 모든 꽃은/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나에게 묻는다’ 중에서)

시인은 표제시 연작에서, 5·18 광주항쟁과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이들이 “모두 한번쯤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라며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악의 평범성 1’)라고 경계한다.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악의 평범성 2’)는 것이다.

2016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촛불 시위’ 이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거나 비관적이다. “아날로그 촛불은 자기 온몸을 태우고 녹지만/ 디지털(LED) 촛불은 장렬하게 전사할 심지와 근육이 없다/ (…) / 그래서 낮 촛불이 타오를수록 더욱 슬프다”(‘촛불은 갇혀 있다’ 중에서)

시인이 시집 맨 말미에 또 한 편의 시처럼 붙인 말은 잠들지 않는 각성이자 강렬한 경구로 읽힌다.

“자기를 처형하라는 글이 쓰인 것도 모른 채/ 봉인된 밀서를 전하러 가는 ‘다윗의 편지’처럼/ 시를 쓴다는 것도 도시의 빈소에/ 꽃 하나 바치며 조문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22년여 만에 그 조화들을 모아 불태운다/ 내 영혼의 잿더미 위에 단테의 <신곡> 중 이런 구절이 새겨진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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