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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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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잘못하면 큰일 나겠다’ 생각하지 않았다

여성 대상 성폭력과 함께 굴러가는 한국의 방송산업…

성폭력 위험 관리는 제작의 기본
등록 2019-07-23 03:04 수정 2020-05-03 04:29
외주 스태프 2명을 준강간한 혐의로 긴급체포된 배우 강지환이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외주 스태프 2명을 준강간한 혐의로 긴급체포된 배우 강지환이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불법촬영) 가해자가 잡혀서 엄하게 처벌하면, 다른 사람들도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 해서 그런 데 발을 안 담그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은 처벌 정도가 어떤가요? (피해자에게는) 평생 멍에가 돼서 살아야 하는 고통일 텐데 벌금 얼마 내고 나온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2018년 5월 SBS 라디오 진행자였던 김성준 앵커는 말했다. 14개월 뒤인 2019년 7월8일, 그는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지하철역에서 치마 입은 여성의 하체 부위를 몰래 찍은 혐의였다. SBS는 그의 사표를 재빨리 수리했고, 는 폐지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위험관리의 심각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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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인 7월9일, 배우 강지환이 자택에서 여성 스태프 두 명을 성폭행, 성추행한 혐의로 긴급체포됐다.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동생들이 댓글로 상처받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오빠로서 미안하다”며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던 그는, 사건 발생 엿새가 지난 뒤에야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피해자들이 소속 회사 관리자에게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고, ‘돈을 노린 꽃뱀’이라는 등 수많은 악성 댓글로 고통받은 다음이었다. 그가 주인공을 맡아 10부까지 출연 중이던 TV조선 는 2주간 결방 후 20부작에서 16부작으로 축소해 종영이 결정됐다.

7월15일에는 하반기 방영을 목표로 제작 중인 드라마 의 조연출이 회식 자리에서 ‘스크립터’를 성추행한 사실이 언론 보도로 알려졌다. 게다가 피해자가 요구한 재발 방지를 위한 사과와 공론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제작 PD가 피해자에게 “피하지 않은 너의 잘못도 있다” 같은 발언을 해 2차 피해를 입힌 것까지 드러났다. 최근 몇 년 동안 방송 제작 현장에서 벌어진 성폭력을 공론화한 영향으로 대본에는 ‘성희롱 예방 가이드라인’도 첨부돼 있었지만, 막상 사건이 일어나자 책임자들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다.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까지 일을 그만두며 촬영은 잠시 중단됐고, 130억원 규모 대작은 편성도 되기 전에 성추행 문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연배우든 조연출이든 누가 성폭력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는 없었겠지만, 제작 차원에서 보면 이는 결국 위험관리의 심각한 실패다.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출연자의 존재 자체가 위험을 동반하기도 한다. tvN 은 3월 촬영 도중 정준영이 불법 성관계 영상 촬영과 유포 혐의로 하차하자 이민우를 투입했으나, 이민우 역시 6월29일 술집에서 여성 2명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입건됐다. 이민우 쪽이 ‘작은 오해로 생긴 해프닝’이라는 입장을 내놓으며 사태를 축소하는 사이, 제작진 역시 마지막 회 방송분에 그의 모습을 편집 없이 내보냈다. 그러나 7월15일 경찰은 폐회로텔레비전(CCTV) 확인 결과를 토대 삼아 이민우를 서울중앙지검에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영상 편집해야 하는 제작진이 안쓰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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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0일에는 MBN 인기 프로그램 에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60대 남성이 출연했던 사실이 보도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방송에 자신과 자신의 딸을 성추행한 가해자가 나왔으며 “TV에 나온 자연인의 집이 사건이 발생한 장소”라고 밝혔다. 그의 요청에 따라 현재 프로그램 누리집에서는 2월 방송된 해당 회차가 삭제됐다.

그러니까 7월8일부터 15일까지, 단 일주일 동안 한국 방송계에서 일어났거나 알려진 사건은 다음과 같다. 유명 앵커는 행인 여성을 불법촬영했고, 미성년자 여성을 성추행한 남성은 당당히 방송에 출연했고, ‘오빠’로 불리던 아이돌은 ‘아는 동생들’을, 남성 스태프는 여성 스태프를 성추행했고, 남성 스타가 여성 스태프를 성폭행했다.

그리고 여성 스타들을 불법촬영하려던 남성 스태프는 실형을 피했다. 방송 외주 장비업체 직원 김아무개씨는 지난해 9월 올리브 해외 촬영에서 여성 출연자의 숙소에 휴대용 보조배터리로 위장한 촬영 장비를 설치했다가 적발됐다. 재판부는 7월10일 김씨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그간 형사처벌 전력도 없고 카메라가 압수되어 (영상이) 외부로 유포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한 결과다.

이처럼 한국 방송산업은 여성 대상 성폭력과 함께 굴러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방송계 갑질 119’와 방송 스태프 노조 준비위원회가 발표한 ‘방송 제작 현장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223명(여성 209명, 남성 14명) 중 “피해를 경험했다”고 한 비율은 89.7%(200명)였다. 이들은 성폭력 발생의 주된 원인으로 ‘성폭력 행위자와의 권력관계’ ‘성폭력을 가볍게 여기는 조직문화’ 등을 지목했다. 미투 운동 이후 용기 있게 피해 사실을 알리는 이는 늘었지만, 가해자 처벌이 미미하고 포털 사이트를 비롯한 온라인상에서 일어나는 2차 피해가 심각한 현실은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여성 대중의 분노와 무기력을 동시에 가중한다. 가해자의 출연 분량을 편집해야 하는 제작진을 안쓰러워하는 여론 역시 피해자 고통을 가릴 뿐 아니라, 애초에 출연자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과거에 물의를 빚은 남성 연예인을 굳이 섭외한 제작진의 책임을 지워버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국 사회가 그들에게 보내온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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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가해자가 잡혀서 엄하게 처벌하면, 다른 사람들도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 해서 그런 데 발을 안 담그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한국 사회가 그들에게 보내온 신호가 그랬으니까. 이제는 성폭력 위험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제작의 기본이어야 한다. 그것은 방송사와 제작사의 윤리적 책무이기도 하지만 실익적 측면에서 더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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