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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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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같은 속물 같은

알고 보면 대단한 남자, 모르고 봐도 좋을 배우 <13년의 공백>의 릴리 프랭키
등록 2019-07-10 02:26 수정 2020-05-02 19:29
<13년의 공백>(2019). 영화사 그램 제공

<13년의 공백>(2019). 영화사 그램 제공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2016)

그를 보면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릴리 프랭키. 국적도 성별도 쉽게 가늠하기 힘든 이름에 영화배우, 베스트셀러 소설가, 일러스트레이터, 방송작가, 연출가, 포토그래퍼, 디자이너 그리고 뮤지션이기도 한 이 사람은 현재 가장 다양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구인이다. 아니, 그 역시 아닐 수도 있지만.

7월4일 개봉한 영화 에서 릴리 프랭키는 담배 사러 나간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 마쓰다 마사토를 연기한다. 13년 만에 가족과 연락이 닿았을 때는 이미 자기 앞의 삶이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휑한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

아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 모습은 마작에 빠져 있거나, 빚쟁이가 찾아오는 불 꺼진 집에서 숨죽여 카레를 먹거나, 가끔 함께 야구를 하고 캐치볼을 나누었던 정도다. 긴 공백 끝에 만난 아들과 아버지는 멀찌감치 떨어져 담배를 나누어 피우는 것 외에 딱히 나눌 것이 없다. 그리고 곧이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무책임하게 가족을 떠나 13년 동안이나 연락이 끊긴, 그리고 바로 죽어버린 이 남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전성시를 이루는 옆 장례식장과는 달리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휑하고 쓸쓸하다. 열 명 남짓한 조문객의 구성을 보자면 마작 친구, 단골 술집의 종업원, 파친코 가게 동료, 여장 남자, 경마 친구, 한때 빚을 수금하던 조폭들까지 아버지의 지난 삶의 궤적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할 정도다.

하지만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한명 한명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마쓰다 마사토라는 사람의 인상은 점점 새롭게 조립된다. 그들의 증언 속에 마쓰다는 “고민을 잘 들어주는 사람” “고음은 안 올라가지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종교 집단에 빠질 뻔한 위험에서 건져준 사람” “스포츠신문의 야한 기사를 많이 스크랩하던 사람” “야구공 만드는 마술을 좋아하던 사람” “아들이 어린 시절 쓴 글쓰기 원고를 여전히 간직한 사람”이다.

“마쓰다는 한마디로 바보였어요. 사람이 워낙 착하니까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못 본 체를 못했죠. 대부분 안 갚고 도망쳤고요. 하지만 마쓰다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모두 “사람이 너무 착해서 탈”이라고 입을 모은다. 장례식이 시작되고 아버지의 영정 사진은 마치 각 이야기의 쉼표처럼 반복해 삽입된다. 그리고 배우 릴리 프랭키의 얼굴은 점점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게 바보처럼 착한 고인이 싫지 않았어요. 사실 좋아했죠.”

71분의 간결하고도 묵직한 영화가 끝나갈 때쯤 아들 역시 “아버지를 싫어하지만 조금은 좋아하는 것도 같다”고 고백한다.

릴리 프랭키, 본명은 나카가와 마사야. “수수께끼 같은 이름을 짓고 싶다”고 생각해 지은 독특한 필명은 대학 시절 단짝 친구와 그를 두고 마치 “장미와 백합 같다”고 표현한 데서 따온 ‘릴리’(백합)라는 이름과 밴드 ‘프랭키 고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에서 따온 ‘프랭키’라는 성을 조합해 만들었다. 작사와 작곡을 할 때는 ‘엘비스 우드스탁’(Elvis Woodstock)이라는 활동명을 쓰고 있기도 하다.

백합의 이름, 의 베스트셀러 작가

2006년 홀로 자기를 키운 어머니와 어머니의 투병 생활을 지켜보던 자기 이야기를 써내려간 소설 가 2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명 작가가 되었고, 이 이야기는 곧 오다기리 조와 기키 기린이 주연한 영화 로 재탄생됐다.

배우로서 삶은 2005년 감독 이시이 데루오가 에서 연기 경험이 전무한 그를 파격적으로 캐스팅하면서 열렸지만, 아마도 많은 한국 관객에게 이 배우가 처음 인지된 시점은 (2013)부터였을 것이다.

크지 않은 키에 왜소한 체격, 힘없이 살짝 벗긴 머리, 듬성듬성 난 콧수염과 턱수염, 작은 얼굴에 딱히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심심한 이목구비는 여러 창작자를 만나 다양한 캐릭터의 옷을 입으며 완전 다른 인상들을 만들어낸다. 소리 없이 입을 벌린 미소 속에 살짝 느슨해져 있을 때 릴리 프랭키와 작은 입을 꽉 다물고 초점을 바짝 쪼았을 때 릴리 프랭키의 인상은 확연히 달라진다.

때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때론 이보다 더 현실적이고 속물적일 수 없다. (2017)에서 릴리 프랭키는 직장 동료와 바람피우는 권태로운 중년처럼 보이지만 실체는 지구에 떨어진 화성인이었다. 극단적인 캐릭터로 보자면 (2018)의 뇌과학 박사나 (2013)의 부동산 중개인 기무라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흉악한 범죄를 지시하는 배후의 ‘선생님’ 기무라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잔혹한 범죄도 서슴지 않는 “죽음을 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였다.

가장 속물 같은 동시에 가장 자유인 같은, 가장 공동체적 인간인가 하면 가장 개인적인, 가장 미쳐 있는 동시에 가장 일상적인 인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런 릴리 프랭키의 본성을 자신의 영화 세계 안에서 최적의 비율로 배합해냈다. 의 아버지는 아이가 뒤바뀐 소송 덕분에 얻게 될 위자료에 기대를 내비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놀아주는, 이보다 더 다정할 수 없는 아버지다.

(2015)의 푸근한 동네 아저씨이자 순애보의 주인공은 비극에 대한 감각을 항시 잃지 않은 상태에서도 인생에 대해 관조하는 사람이다. (2018)의 아버지는 좀도둑으로 생계를 연명하는 처지에도 세상에 버려진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거두지 못하는 남자다. (2016)의 흥신소 소장을 연기할 때는 “어떤 사람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져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거야” 같은 명언을 던지는 중에도 자기 몰래 딴 주머니를 찬 직원에게서 돈봉투를 살뜰히 뺏아간다.

(왼쪽 위부터)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아버지와 이토씨>(2016) <어느 가족>(2018). 각 영화사 제공

(왼쪽 위부터)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아버지와 이토씨>(2016) <어느 가족>(2018). 각 영화사 제공

극단적인 캐릭터에 깃든 측은지심

쉰이 넘은 나이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인에게 야단을 맞아도 웃기만 하고, 몰래 만화 잡지나 훔쳐보는 한심한 남자. 영화 의 주인공 아야(우에노 주리)는 릴리 프랭키가 연기하는 이토씨를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패배자, 낙오자, 저렇게 되면 끝장.’ 그때 지나가던 다른 직원이 마치 아야의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툭 이런 말을 던진다. “알고 보면 대단한 남자일걸?” 언제라도 돌아갈 자신의 별이 따로 있는 다정한 외계인 릴리 프랭키. 알고 보면 대단한 남자다. 물론 모르고 봐도 좋은 배우다.


이 배우의 비트


의 머리 때리기
처음 사람을 때린다면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화면 갈무리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화면 갈무리

6년을 키운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산부인과 간호사의 고의로 바꿔치기된 두 소년 게이타와 류세이. 이제 법원은 이들을 원래 부모에게 돌려놓으려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에는 극단적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극단적으로 다른 두 아버지가 등장한다. 대기업 건축사로 도쿄 중심부에 사는 료타 노노미야(후쿠야마 마사하루)와 변두리 도시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는 유다이 사이키(릴리 프랭키)는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상태부터 삶과 육아에 대한 생각까지 어느 하나 겹치는 부분이 없다.
“시간만 중요한 게 아니죠.”(료타) “무슨 소리예요, 얘들한텐 시간이에요.”(유다이) “내가 아니면 안 되는 (회사) 일이 있어서요.”(료타) “아버지란 일도 다른 사람은 못하죠.”(유다이)
철저한 자기 관리 속에 늘 이기는 삶을 살아온 료타는 “우린 뭐든 혼자서 하게 하는 방침”이라며 아이와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독립적으로 키운다. 반면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하지 않는다”는 신조로 느긋하게 살아가는 유다이는 온몸으로 뒤엉켜 놀며 아이들을 키운다. 아이를 바꾸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올수록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는 료타와 달리, 유다이는 아이들과 뒤뜰에 누워 “여름이 되면 불꽃놀이하고 수영장에 들어가고 수박 깨기도 하자꾸나”라며 새로운 조합의 가족과 익숙한 꿈을 꾼다. 대비적인 캐릭터는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료타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아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다면, 유다이는 아이 눈높이에 맞춰서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
시종일관 온화하던 유다이가 싸늘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두 아들 다 포기할 수 없는 료타가 오만하게도 자신의 경제적 여유를 내세우며 “게이타와 류세이를 내가 다 키우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유다이는 잠시 주춤하다가 료타의 머리를 한 대 때린다. 분노를 담아 세게 뺨을 때리는 것도, 발로 걷어차는 것도, 강하게 머리를 후려치는 것도 아니다. 겨우 밀듯이 이마를 퍽 치는 것이다. 유다이를 연기하는 배우 릴리 프랭키는 정말 어설프게 그 비트를 완수한다. 이 즉각적이면서도 본능적인 반응은 살면서 누군가를 때려본 적 없는 사람의 행동임을 알 수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게 있어.” 이 비트를 통해 릴리 프랭키는 그저 가난하고 자존심 없고 기준 없이 사는 사람처럼 보였던 유다이를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충만하고 평화로운, 그러나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그 기준만큼은 누구보다 분명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한다.
*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
백은하 배우연구소(@ una_labo)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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