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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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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이 열린다 ‘광’이 난다

<기생충> 비밀의 문 여는 ‘낯선 방문자’ 이정은
등록 2019-06-28 10:53 수정 2020-05-03 04:29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영화 <기생충> <우리 지금 만나> <옥자>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 각 영화사 제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영화 <기생충> <우리 지금 만나> <옥자>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 각 영화사 제공

“띵동 띵동-.”

초인종이 울린다. 그리고 한 여자의 얼굴이 인터폰 모니터 위로 떠오른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찾아온 “계획에 없던” 방문자는 바로 이 집의 전 관리자이자 가사도우미였던 문광(이정은)이다. 비에 홀딱 젖은 몰골, 여기저기 맞고 멍든 흔적, 삐뚤어진 안경,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눈빛. “안녕하세요… 저 여기서 일하던 사람인데요. 제 후임으로 오신 분인가보다….” 그의 살가운 말투와 웃음은 해맑아서 괴상하고, “쭌이, 베리, 푸푸” 강아지 이름까지 대가며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설득하는 태도는 구체적이어서 소름 끼친다. 사실 문광은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 가족의 음모 때문에 갑작스럽게 해고당한 상태다. 그래서 미처 챙겨 나가지 못한, 지하실에 두고 온 ‘무언가’ 때문에 이 집을 다시 찾는다. 누적 관객 수 900만 명을 향해 가는 영화 의 포스터가 숨겨둔 비장의 다리, 문광의 재등장과 함께 이 영화의 장르는 급반전 물살을 탄다. 제7의 멤버인 배우 이정은은 캐릭터 이름의 머리글자 ‘문’(門)처럼, 저택의 대문부터 지하실로 가는 비밀의 문까지, 의 중요한 문들을 관객에게 처음 열어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의 숨은 봉인을 자신만의 기괴한 호흡과 방식으로 풀어가며 대체 불가의 존재감을 확립해낸다.

어떤 역이든 일상과 영혼을 다 아는 듯한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 배우 이정은을 처음 인지하게 되었던 영화 에서도 그는 문을 열어주었다. “띵동 띵동-.” 이번에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상황과는 반대로 배우 송강호다. 그가 연기한 변호사 송우석은 막노동하던 시절 자신이 지은 아파트를 다시 찾는다. “10층 1003호.” 아주머니(이정은)는 문을 빼꼼히 열어 우석이 내민 변호사 명함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받아든다. 집에 들이긴 했지만 이 낯선 사내의 방문이 영 마뜩잖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집 살라꼬예”라고 선언하는 우석의 이야기에 처음엔 집 안 내놨다고 역정 내던 주인 여자는 시세보다 후한 가격 제안에 “아이고, 뭐 쥬시라도 드실랍니까?”라며 태도를 급전환한다. 화장품 방문판매원에게 메이크업을 받던 중 벌어진 상황 때문에 오른쪽만 진하게 눈화장이 된 탓에, 이 여자의 인상은 고갯짓 한 번만으로도 의심의 얼굴과 환대의 얼굴을 중간 없이 훅 뛰어넘는다.

으로 이어졌던 한 작품 내에서 급격한 온도 변화는 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한 종이 담배를 말아 꼬나물고 달거리 여부에 따라 은 만드는 일을 시킬 소녀와 일본으로 보낼 소녀를 분류하는 배우 이정은의 얼굴은 너무 평온하고 일상적이어서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노비 소녀들을 관리하는 지하조직 중간책의 피도 눈물도 없는 태도는 자신들을 일망타진하러 온 명탐정 김민(김명민)을 보자마자 빠르게 비굴해진다.

드라마 에서 ‘함안댁’의 다정함, 의 충격과 함께 비로소 널리 알려진 이정은은 누군가에겐 낯선 방문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1991년 연극 으로 데뷔한 배우 이정은은 봉준호 감독의 극찬을 받은 뮤지컬 를 포함해 무대와 카메라 앞을 오가며 쉼없이 관객을 찾고, 꾸준히 모스부호를 보내온 배우다. 영화 에서 마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중 한 명으로도 나왔다.

를 연출한 부지영 감독과의 인연은 지난 5월29일 개봉한 옴니버스영화 ‘여보세요’ 편으로 이어졌다. 지하철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평범한 얼굴, 무표정한 표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정은(이정은)은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청소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이상한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여보세요?” “시간 있으면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 저 사람을 좀 찾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북한에서 온 전화다. 처음엔 보이스피싱으로 의심했던 전화는 사실 남한으로 간 뒤 소식이 끊긴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한 북한 여자(이상희)에게서 걸려온 것이다. 치매를 앓으며 한국전쟁 때 헤어진 여동생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둔 정은에게, 북한 여성의 목소리는 마치 본 적 없는 이모 목소리처럼 느껴진다. 오가는 통화 속에 서로를 ‘남한의 전지현씨’ ‘북한의 송혜교씨’라고 부르며 가까워진 상태에서 정은은 당신 아들을 찾아주겠노라고 호기롭게 약속한다. 여기저기 기관을 찾아다니며 브로커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먼 친척의 일이라고 거짓말까지 하는 정은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묘한 활기가 느껴진다. “거기 책임자가 제 연기에 감동먹어가지고 (당신 아들에 대해) 알아봐준대요.” 부지영 감독은 배우 이정은에게서 “어떤 역할을 맡기더라도 그 역의 일상과 영혼을 다 알고 있다는 믿음”을 보았다고 말한다.

‘여보세요'에서 서울 사투리를 구사하는 ‘왕십리 토박이’ 이정은은 작품마다 각 지역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오간다. 에서 보여준 북한 아나운서 성대모사를 비롯해, 에서는 광주 택시운전사(유해진)의 갓김치 잘 담그는 아내로 나와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에서 함께했던 배우 송강호는 이정은의 의심할 여지 없는 경상도 여성 연기에 “집이 부산 어디라고 했지?”라고 물었을 정도다. 하지만 이정은은 사투리 자체를 세고 도드라지게 만들어 강한 인상을 남기는 대신 의 방파제 여자처럼 인물이 특정 사투리를 쓴다는 사실을 잠깐 잊게 할 만큼 캐릭터 자체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행복함과 절박함을 오가는 ‘옥자’의 목소리

곡선으로 이루어진 동글고 귀여운 인상과 달리 배우 이정은의 음성은 삐쭉빼쭉 서로 다른 길이로 솟구치고 삐져나온다. 그 무정형의 발성과 불규칙한 꺾임을 귀 기울여 들은 봉준호 감독은 의 슈퍼돼지 ‘옥자’ 목소리로 이정은을 캐스팅했다. 전국 돼지농장들을 돌아다니며 연구한 끝에 이 배우는 행복함과 절박함, 기쁨과 공포를 오가는 주인공 옥자의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등장인물들은 과외선생, 미술선생, 운전기사, 가사도우미 등 원래 누군가의 자리를 대체하며 입주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정은은 기존 배우들의 자리를 대체하거나 계승하며 충무로에 입성한 배우가 아니다. 그래서 이 배우에 대해서는 뒤늦은 발견보다는, 기존 지형도를 변형하며 마침내 융기한 배우라고 부르고 싶다. 에서 박 사장 집에 처음 들어선 기우(최우식)가 집의 외관을 보고 감탄하자, 그를 안으로 이끌던 문광은 “내부도 좋아요”라고 무심하게 답한다. 이제 막, 이정은이라는 배우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놀란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기대하시라. 내부는 더 좋을 것이다.


이 배우의 비트


‘방파제 여자’의 딸꾹질과 트림
뺏은 게 만원짜리 한 장일까


영화 <미성년> 화면 갈무리

영화 <미성년> 화면 갈무리

영화 에서 중년 가장 대원(김윤석)은 불륜 중이다. 로맨틱한 바람 정도로 생각했던 오리집 사장 미희(김소진)와의 관계에서 덜컥 아이가 생기고, 이 사실을 아내 영주(염정아)와 딸 주리(김혜준)까지 다 알아버리자 대원은 점점 궁지에 몰린다. 무작정 차를 몰아 서해안에서 펜션을 한다는 친구를 찾아가지만, 이미 펜션은 문 닫은 지 오래다. 갈 곳 없는 대원은 혼자 방파제에 넋을 놓고 앉아 있다. 점점 썩어 들어가는 속 냄새를 맡은 것일까. 주변으로 파리떼가 꼬인다.
저 멀리, 희뿌연 안갯속에서 몸뻬에 방한조끼를 입고 누군가 걸어온다. 뻣뻣한 오른 다리를 살짝 끄는 털퍽털퍽한 발걸음으로, 찌들고 취한 듯한 몸을 휘청휘청거리며. 대원 옆에 나란히 선 정체불명의 여자(이정은)는 이내 가까이 다가앉더니 다짜고짜 말을 붙인다. “어억- 꺼억, 어디서 왔어요? 차 세워놓은 거 보니까 저 먼 데서 온 것 같더구먼. 서울서 왔어요? 으응 (딸꾹질) 끄윽-. 언제 왔어요. 누구 여- 뭐- (새끼손가락 흔들며) 만나러 왔어? 어떻게 여기 왔데요, 동네도 쪼깐한데….” 상대의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는 질문을 쉴 틈 없이 이어가는 가운데, 배우 이정은은 마치 되새김질하듯 위장에서 끄윽끄윽 올라오는 트림과 딸꾹질을 추임새 삼아 괴상한 리듬의 대사를 이어간다. 바다의 짠내와 뒤섞인 이 사람 냄새가 선을 넘어 스크린 밖으로 풍겨나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낯선 침입자는 이내 자신의 목적을 말한다. “나요, 주차비 좀 줘봐요. 남의 동네 와서 좋은 경치에다 어- 바다 구경도 하고 여- 차도 공짜로 다 세워놨으면 주차비 좀 내야지.” 만원짜리 한 장을 ‘갈취’한 여자는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막걸리 먹자”며 동네 오토바이 청년들을 향해 걸어간다. 이 2분10초의 비트를 통해 배우 이정은이 뺏은 건 단지 만원짜리 한 장만이 아니다. ‘방파제 여자'의 이상한 등장은 안전한 가정과 직장 안에서 적당히 무책임한 삶을 살아가던 대원의 세상에서 평화를 앗아간다. 딸꾹질과 트림으로 작은 균열을 만들고 묘한 불안의 기운을 불어넣은다. 그는 언뜻 어느 마을 어귀에서 마주칠 법한 술 취한 ‘돌아이' 정도로 보이지만, 이후 대원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을 생각하면 어쩌면 이 동네를 장악한 암흑의 대모였을지도 모른다. 눈 뜨고 코 베어가는 배우 이정은의 능청스러운 비트에 대원도 관객도 훅, 당해버렸다.
*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
백은하 배우연구소(@ una_labo)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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