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미소, 꼿꼿한 포옹, 독립적인 동행. 배우 김새벽은 언뜻 어울리지 않는 수식으로 설명되는 배우다. 도통 관습적 표현이나 카테고리 속으로 밀어넣을 수 없는 이 배우는 그렇게 부드럽게 휘감기는 공통된 감정의 한가운데 늘 곧고 투명한 자기만의 척추를 세워놓는다. 8월29일 개봉한 는 이런 배우 김새벽의 특징을 과장 없이, 그러나 빠짐없이 담아낸 영화다.
고작 두 명의 학생을 앞에 두고 동네 한문학원 선생님이 칠판에 또박또박 한 문장을 써간다.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그리고 묻는다. “여러분이 (얼굴을) 아는 사람들 중에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영화 의 영지 선생님은 가족도 친구도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열네 살 은희(박지후)의 속마음을 처음 고요한 시선으로 알아봐준 사람이다. 김새벽이 연기하는 영지 선생님은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혼란 속에 성장하던 은희는 영지 선생님과 속마음의 기록을 나누며 비로소 나쁘고도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열네 살의 토끼굴로 떨어지는 고통여성 감독 김보라의 놀라운 데뷔작인 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돼 넷팩상을 받은 이후 지난 1년간 베를린 국제영화제,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 등 세계 25개 영화제의 상들을 그 작은 부리로 집어올린 무시무시한 영화다. 1994년 대한민국 서울 대치동에 살았던 방앗간 집 딸 은희의 아파트 문을 여는 순간, 각기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다른 환경에서 자신의 유년을 견뎌낸 관객은 모두 열네 살의 토끼굴로 떨어지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무너진 성수대교처럼 끊어졌던 성장의 기억은, 날을 세운 유리 조각처럼 여전히 반짝거리며 그곳에 서 있고, 25년 전 과거는 추억하고 회고하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고통과 기쁨으로 다가온다.
영화 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말레이시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김새벽은 어떤 관객에게는 아직 모르는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관객에게 김새벽은 이미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배우다. 2012년 조선족 소녀 순희로 나온 를 시작으로 등으로 이어지며 독립영화계에서 비옥한 땅을 일군 김새벽은, 2019년 에서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김향화로 100만 명 이상 관객에게 존재감을 알렸다. 그리고 의 힘찬 날갯짓과 최근 촬영을 마친 설경구·이선균 주연의 라는 구름판을 통해 더 넓고 먼 땅으로 비상할 예정이다.
식물성 얼굴에 동물적 힘… 반전의 배우조용한 왼손잡이, 마른 몸, 버터도 설탕도 넣지 않고 구워낸 담백하고 창백한 맛과 색의 식물성 크래커 같은 얼굴을 가진 그의 외양은 정적인 식물처럼 오해될 수도 있지만 정작 배우 김새벽은 사부작사부작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체력도 지구력도 좋은 동물적 모험가다. 의 조선족 소녀 순희는 잔뜩 움츠러들고 의뭉스러운 데가 있긴 하지만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강한 소녀였다. 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의 낡은 식당을 개조해 새로운 식당을 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혜진은 만 개의 꿈보다 만 보의 움직임을 믿는 여성이다. 수원 지역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끝에 서대문 감옥 여옥사 8호실에 유관순과 함께 수감된 의 김향화가 한 “만세 누가 시켜서 했습니까?”라는 말에는 훈계도 화도 없는 자존감과 강단이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에서 출판사 직원 창숙은 불륜 관계인 사장 봉완(권해효)이 우물쭈물하는 순간에도 “우리 사랑만 하다 죽어요!”라고 외친다.
에서 그 누구도 쉽게 판단하지 않고 동정하지 않고 또 비웃지 않는 김영지 선생의 태도는 어쩐지 배우 김새벽과 많이 닮아 있다. 뿐 아니라 을 봐도 김새벽이라는 배우가 가진 고유의 결을 한 올도 빼지 않고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어 하는 감독들의 열망이 느껴진다. 감독들은 종종 김새벽에게 큰 상황만을 주고 자유롭게 대사를 부탁하기도 한다. 그것이 감독이 꼼꼼하게 미리 짜놓은 그물이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던져진 뜰채이건 간에 김새벽은 펄떡거리는 무언가를 포획하는 손맛을 안겨주는 배우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는 다큐인 듯 찍은 극영화다. 이 영화에서 김새벽은 고조라는 일본 소도시에서 영화를 찍게 된 감독의 사전 취재를 돕는 여자 미정과 아마도 그 감독이 찍게 된 영화 속 주인공인 혜정을 동시에 연기한다. 실제 일본 고조에 사는 노인들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인터뷰가 나오는 등 과연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누가 배우인지 궁금해지는 영화다. 에서 “배우라는 일이 어려워요. 일이 좋아서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아요”라는 혜정의 고백은 배우 김새벽이 직접 쓴 대사기도 하다.
가방 안엔 아직도 ‘자신감’ 글귀가부산에서 비디오 가게를 하셨던 부모님이 안겨준 영화라는 ‘위대한 유산’을 받은 김새벽은 연기 꿈만 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취직했다”는 곧 들킬 거짓말을 남기고 간 그가 사실 배우가 되었다고 고백했을 때 어머니는 “네가 연기를?” 하고 놀랄 정도였다. 데뷔작 를 찍을 때는 영화 제목처럼 안에서 깨고 밖에서 쪼아주는 시기였다. ‘자신감’이라는 글자를 종이에 적어 가방에 넣고 다닐 정도로 소심한 신인 배우였던 김새벽은 아직도 그 종이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배우의 가방엔 그사이 손에 잡히는 큰 덩어리의 결실도 함께 채워졌다. 아침을 기다릴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새벽이다.
이 배우의 비트
잘 먹는 입
격렬하고 경건하게
김새벽 배우가 좋아한다고 꼽은 의 롱테이크 식사 장면은 거의 5분에 이른다. 부모 역의 기주봉·조경숙과 남자친구 역의 조현철까지 네 배우의 호흡으로 생동감 있게 펄떡이는 긴 비트 속엔 가족의 일상적인 대화부터 결혼 문제를 둘러싼 격앙된 감정까지 다채롭게 포진돼 있다. 김새벽은 골치 아픈 대화 속에서도 좀처럼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 폭풍 같은 싸움이 휩쓸고 간 다음 날 아침, 남자친구 어머니 집에서 하는 식사도 마찬가지다. 어딘가 어색할 수 있는 문제투성이 예비 가족 분위기는 김새벽의 분주한 숟가락과 함께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에서도 미래의 성공을 꿈꾸는 디자이너로 등장한 김새벽은 정말 열심히 그리고 맛있게 칼국수를 먹는다. 에서 샌드위치와 감말랭이와 공깃밥을 먹는 비트들은 클로즈업으로 표현돼 있지 않지만 그 먼 거리에서도 꼭꼭 씹어서 먹는 김새벽의 입만은 도드라져 보일 정도다. 한번 음식을 물고 나면 소리도 내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광대 아래의 모든 뼈와 근육을 격렬하게 움직여서 이것이 마치 세상 마지막 식사인 양 최선을 다해 먹는 김새벽의 입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경건할 정도다.
김새벽은 좀처럼 감정이나 욕망을 크게 분출하거나 목소리를 높이거나 하지 않는 배우다. 식물처럼 물과 태양만으로 충분히 생존할 것처럼 보이는 이 배우의 연기 톤과 상반되는,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먹방’의 순간은 그 캐릭터들 안에 숨어 있는 조용하지만 동물적인 기운을 짐작하게 한다. 오직 생명이 있는 존재들만이 먹을 수 있다. 살아 있는 혹은 살아가야 하는 자들만이 먹어야 한다. 배우 김새벽은 자신이 그런 인물들을 체화해내고 있음을 매 영화의 비트에서 맛있게 증명한다.
*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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