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세대가 기억하는 배우 안성기는 참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에겐 의 안성기, 누군가에겐 의 안성기, 어떤 세대에겐 커피 향기로 기억되는 부드러운 남자일 것이고, 어떤 세대에겐 “날 쏘고 가라”()는 유행어로 기억되는 배우일 것이다.
순수의 아이콘, 성실한 어른1953년생.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시작한 아역 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안성기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참으로 다양하고 방대한 필모그래피(출연 영화 목록)를 자랑하는 배우다. 1980년대 초·중반 안성기는 의 순박한 청년 덕배나 의 주석처럼 거칠고 냉랭한 도시화의 바람에 맨얼굴로 나선 평범한 소시민의 얼굴이었고, 집착과 광기로 한 여자의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의 ‘미스터 M’이나 욕망 앞에서 폭력과 배신,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르는 의 백호빈처럼 분열증에 걸린 시대가 그려낸 안쓰러운 초상이었다. 혹은 의 민우처럼 아예 세상의 경로를 벗어나 자기만의 자갈길을 터벅터벅 걸어나가던 자유인이거나, 의 영민, 의 병태나 이후 21세기의 로 이어지는 사랑에 서툰 소년 같은 얼굴, 순정과 순수의 아이콘(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답답한 시대는 그를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개그맨’으로, 암울한 인생을 붓으로 덧칠하는 간판장이()로, 월남전의 후유증을 앓는 소설가()로 그려냈고, 이어지는 혼란의 시대는 그에게 다양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얼굴로 화답했다. 안성기는 의 부패한 ‘조 형사’에서 의 ‘정조’로 가파르게 오갔고, 미용가위를 들고 과장된 춤을 추는 의 파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의 춘희(심은하)가 만들어낸 시나리오 속 남자 주인공처럼 이상적이지만 ‘인공’적인 남자가 되었다가, 은행나무 잎이 휘날리는 비 오는 계단에서 칼을 휘두르는 의 킬러가 되기도 했다. 나 처럼 굳히기 한 판이나, 나 같은 반가운 귀환도 종종 선사했다.
그의 이름 앞을 떠나지 않는 ‘국민배우’라는 수식은 성실한 필모그래피와 함께 어느덧 동년배들이 사라진 현장에서 외롭고 부담스러운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한국 영화계에 발생하는 일들에 제일 먼저 달려가는 ‘어른’의 모습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영화 에서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쪽도 좋고 저쪽에도 맞추는 ‘중재자’의 역할은 조금 과장이기도 하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안성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짐작게 한다. 성실하다고 모두 좋은 배우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안성기는 좋은 배우로 신뢰받기 위해 성실함이 어떤 힘을 가지는지 보여준다.
그의 성실함을 떠올리면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2001년 영화주간지 에서 일할 때 일본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와 한국 국민배우 안성기의 대담을 진행했는데, 인터뷰 전날 한국에는 거의 허리까지 쌓이는 폭설이 내렸다. 차가 도통 갈 수 없는 상황이라 기자들도 담당자들도 다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성기 배우는 먼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시간 넘게 홀로 기다린 것에 일말의 짜증도 없이, 교통 상황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혼자 지하철을 타고 왔노라며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서 “뭐 저리 잘 뛰어? 뭐야 람보야?”라고 사냥꾼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던 문 영감, 안성기의 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평생을 멈춘 적 없는 꾸준한 운동으로 좀처럼 변함이 없는 그의 신체는 세월에 잠식당하지 않은 이 사람의 푸른 기운과 더없는 조화를 이룬다. 의 주인공 오 상무의 이름이었던 ‘정석’처럼, 꼼수 부리지 않고 바른길만 갈 것 같은 남자, 일탈 없이 온화한 바른 생활 사나이. 이처럼 60년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안성기’라는 이름의 대표성과 상징성은 확고하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훼손 없이 지켜내고 싶은 ‘국보 1호’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정작 한 명의 예술가로서 이 배우에 대한 기대, 엔터테이너로서 변화와 확장의 가능성을 막아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배우로서 안성기는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고 점점 흥미롭지 않았다.
7월31일 개봉하는 영화 에서 배우 안성기는 악에 맞서 싸우는 구마 사제 ‘안 신부’로 등장한다. 고령에도 악마와 맞서는 육체적으로 고된 작업을 멈추지 않는 그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믿음 깊은 사내다. 이미 20년 전 영화 (1998)에서 퇴마사 박 신부를 연기했던 안성기에게 아주 새로운 역할은 아니다. 하지만 의 안 신부를 연기하는 안성기에서는 낯선 흥미로움이 발견된다.
바티칸에서 온 구마 사제인 안 신부는 본업에 집중할 때의 진지함과 일상의 엉뚱함이 최상의 비율로 배합된 캐릭터다. 악령이 깃든 부마자와 싸워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에도 “내가 맷집이 좀 좋아”라고 허세를 떨고, “마귀랑 싸웠더니 출출하다”며 짜장면을 주문한다. 신부가 술도 마시냐는 용후(박서준)의 딴지에 “난 와인을 주로 마셔”라며 느긋이 음주 취향을 알려주거나 “젊을 때 인기가 많았어. 러브레터도 많이 받았고…”라며 묻지도 않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을 쫓아내는 비현실적이고 극적인 직업 혹은 소명의 무게는, 천연덕스러운 너스레와 엇박을 타며 바람을 빼는 현실적 유머를 만나며 비로소 땅 위에 정착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 안 신부의 전사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이 독특한 개인의 매력을 배가한다.
한국형 버디물의 새로운 파트너이런 안 신부의 의외성은 격투기 선수와 구마 사제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의 경계를 허물며 두 사람을 신선하게 어우러지게 한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이후 신을 의심하고 미워했던 용후는 안 신부의 강요하지 않는 증명 속에 오래전 버렸던 믿음을 복구해나간다. 이 둘은 선생과 제자 같기도 하고 아버지와 아들 같기도 하다. 안성기와 박서준은, 로 이어지며 안성기와 박중훈이 만들어냈던 한국형 버디물(두 남자의 우정을 다룬 영화)의 2장을 여는 새로운 파트너처럼 보일 정도다. 꽁꽁 숨겨두었던 배우 안성기의 매력이 사제복 안에서 살짝 삐져나왔다. 그 매력을 조금 더 보고 싶어진다. 반세기 만에 이 배우가 마침내 흥미로워졌다.
이 배우의 비트
, 재판을 ‘정의’하는 수학자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하지만 이 과격한 행동의 연료는 분노가 아니다. 변호사 박준(박원상)이 “법은 쓰레기!”라며 자조할 때 오히려 김 교수는 “법은 수학하고 똑같아요. 문제가 정확하면 답도 정확하죠. 모순이 없어요”라고 성직자처럼 평화롭게 설명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그 “아름다운 법”을 교묘하게 기만하는 법 집행자들의 문제라며 “법을 안 지키는 판사놈들, 이 법으로 박살 낼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특히 항소심 3차 공판에서 김 교수는 정확한 법적 근거와 논리적 오류를 찾을 수 없는 합리적인 “촉구”로 재판장의 말문을 막는다. 공판을 끝내고 호송버스에 오르기 전, “오늘 재판 어떠셨어요?” 하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김 교수는 “본 대롭니다.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고 대답한다. 분명 글로 읽는 이 대사에는 분노가 느껴질 것이다. ‘개판’이라는 단어는 세고 자극적이다. 하지만 배우 안성기는 이 대사를 놀랍도록 건조하고 차분하게 발화한다. 비아냥거리는 것도, 훈계하는 것도, 역정을 내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마치 ‘1+1=2’라는 것에 의심이 없듯이 방금 법정의 상황은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라고 정답을 내놓는 태도다. 그리고 마무리 인사를 하듯 살짝 보내는 고갯짓으로 이 40초 비트의 마침표를 찍는다.
지지자들은 김 교수를 “사법부 피해자들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지만, 그는 윤리·도덕적 판단으로 선을 행하는 영웅이거나, 승리를 위해 치밀하게 전략을 짜는 승부사가 아니다. 그저 답이 아닌 것을 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틀렸음을 기필코 알려줘야 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질 것임을 알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멈출 수 없는 사람, 이 독특한 캐릭터를 배우 안성기는 부러지지 않는 화살처럼 곧고 정확한 비트로 완성해낸다.
*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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