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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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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라

시대극 속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 키라 나이틀리
등록 2019-04-03 10:39 수정 2020-05-03 04:29
맨 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스타워즈> <슈팅 라이크 베컴> <어톤먼트> <비긴 어게인>. 각 영화사 제공

맨 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스타워즈> <슈팅 라이크 베컴> <어톤먼트> <비긴 어게인>. 각 영화사 제공

어머, 저 턱 좀 봐.

배우 키라 나이틀리의 얼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잘생긴 턱이다. 귀 옆으로 쭉 뻗어 내려오다가 멋진 각도로 꺾인 턱. 그리고 170㎝의 큰 키와 납작한 가슴, 깡마른 몸매, 검은 머리. 볼륨 있는 몸매의 금발 미인이 미국 할리우드 여배우의 기본값으로 통용되고, 각 없는 달걀형 얼굴을 선호하는 한국 관객에게, 나이틀리의 외양은 분명 ‘서양 여배우 판타지’를 충족해주지 못한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 턱 나온 검은 머리의 마른 여배우 </font></font>

시각의 예술인 영화에서 배우의 육체는, 액션과 대사가 시작되기 전에도, 무기이자 그 자체로 언어다. 키라 나이틀리는 타고난 자신의 무기와 언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데뷔 때부터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2002)에서 나이틀리가 연기한 여자 축구선수 줄리스는 소년과 소녀의 중간처럼 보인다. 뜨거운 한낮 축구장 위의 줄리스는 강인한 턱을 헤어밴드로 드러내고, 시원하게 뻗은 긴 다리로 축구공을 날린다. 반면 흥겨운 한밤의 파티에서는 군살 없이 아름다운 등을 드러낸 채 아찔하게 웃고 춤춘다. 언뜻 여성적 무기가 부족해 보이는 키라 나이틀리의 육체는 어떤 성에도 통용될 매력적인 언어로 말을 건다. 각진 턱은 살짝 앞으로 튀어나와 벌어진 입술로 수렴되며 묘한 성적 매력을 배가하고, 큰 키와 마른 몸은 섬세한 드레스와 각 잡힌 턱시도를 모두 만족시키는 근사한 틀이 된다. 탐스러운 흑발은 때론 지성의 색으로, 때론 욕망의 붓이 되어 스크린을 진하게 물들인다.

3월27일 개봉한 영화 에서 프랑스 파리의 스캔들 메이커 ‘콜레트’가 남성과 여성에게 동시에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은 배우 키라 나이틀리의 겉모습에서 1차적 설득력을 얻는다. 소녀의 첫사랑도, 소년의 단짝 친구도, 여성들의 롤모델도, 남성들의 뮤즈도 될 수 있는 사람. 여성적이라서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그저 그 자체로 매혹적인 피조물. 나이틀리의 각진 턱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가는 관성적 길에 놓인 과속방지턱이다. 그리고 ‘쿵’ 하고 놀라 멈춰선 관객에게 그녀의 멋진 턱을 우러러보게 만든다. 비긴 어게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세요.

배우인 아버지와 시나리오작가인 어머니 덕에 엔터테인먼트(연예) 세계를 놀이터처럼 여기며 자랐던 나이틀리가 3살 때 받고 싶었던 선물은 ‘에이전트’였다. 결국 6살 때부터 진짜 에이전트를 고용해 대중 앞에서의 삶을 시작한 소녀는 채 10살이 되기도 전에 배우로 데뷔했다. 이렇듯 배우가 될 환경을 타고난 아이는 “엄마 아빠!”라는 대사만 잘하면 사랑받을 수 있었던 귀여운 소녀의 시간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시장성 있는 국제스타로 자리잡게 한 영화 과 유명한 스케치북 고백을 받은 를 찍을 때가 17살이었다. 배우 에마 톰슨을 롤모델로 품었던 어린 배우는 (2005)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가 되면서 제인 오스틴 클럽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으로 시작해 (2007) (2012)로 이어졌던 감독 조 라이트와의 협업은 이 배우의 20대를 풍성하고 화려하게 채웠고, 감독 토니 스콧,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존 카니와의 실험은 이 배우의 필모그래피에 다양성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영국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가장 바쁘고 치열하게 10대, 20대를 보냈던 나이틀리는 한 해에 평균 2.5편씩 무려 40편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작품 수로는 어느 나이대 배우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베테랑이 된 셈이다. 올해만 해도 를 포함해 까지 총 4편의 영화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2019년, 그녀의 나이는 고작, 서른넷이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 “딸에게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안 보여줄래요” </font></font>

(1999)에서 키라 나이틀리는 내털리 포트먼이 연기한 아미달라 여왕의 시녀로 등장한다. 여왕을 지키기 위해 그녀처럼 꾸민 대역이었다. “분장하고 나면 부모님도 못 알아볼 정도로” 유사한 이목구비 덕이었다. 이 영화로 12살 영국 소녀는 안전하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장에 합류했지만 돌이켜보면 이 역할은 마치 전쟁의 서막처럼 느껴진다. 에서 자신이 생일 선물로 준 곡으로 히트곡을 만든 얄미운 전 남자친구처럼, 나이틀리의 필모그래피 속 페르소나(인격)들은 늘 재능과 정체성을 뺏으려는 자들, 얼굴과 이름을 지우려는 자들과 치른 치열한 전투의 기록이었으니까.

에서 나이틀리가 연기하는 ‘콜레트’는 예술적 재능이 넘쳐나는 여성이다. 하지만 자신이 쓴 자전적 소설 ‘클로딘’ 시리즈를 남편 이름으로 출판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100년 전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당시 여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희생이자 내조였다. “내 이름은 클로딘, 나는 몬티니에 산다. 나는 1884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곳에서 죽지는 않으리라.” 타고난 환경에 발목 잡히지 않고 삶과 죽음의 터전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소녀 클로딘의 이야기를 읽은 뒤, 많은 프랑스의 여성 독자들은 “클로딘은 바로 나 자신이에요”라며 지지를 보낸다. 콜레트는 더 이상 그림자 속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결국 남편에게 잠시 양도했던 목소리를 되찾고, 시대가 지웠던 자신의 이름을 책 표지에 새겨넣는다.

동시대 여성들의 롤모델이자 모두가 사랑한 셀러브리티 그리고 20세기 아이콘이 되었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영화 속 콜레트가 소설 속 클로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소녀 시절을 기술했다면, 배우 키라 나이틀리는 영화 속 콜레트의 목소리를 빌려 현대 여성들에게 “당신의 잃어버린 이름을 찾으라”고 웅변한다. 지난해 10월 미국 NBC 에 출연한 나이틀리는 3살 반이 된 딸에게 특정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여주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는 부자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길 기다리는 이야기잖아요. 안 돼요. 스스로를 직접 구해야죠. 물론 의 노래들은 너무 좋아하지만, 당신의 목소리를 남자를 위해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나이틀리를 찾아온 혹은 이 배우가 선택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시대에 불시착한 여성들이었다. 축구에 빠진 영국 소녀, 해적이 된 상류층 여성, 결혼 시장의 적당한 상품이 되길 거부하는 가난한 집 둘째 딸, 낮은 신분의 남자에게 욕망과 사랑을 먼저 고백하는 의 세실리아, 타인의 시선에 결박당하지 않은 채 사랑에 모든 걸 걸었던 , 여성의 뇌를 믿지 않던 보수적 시대에 지성의 진짜 존재 이유를 알려준 (2014)의 조안 클라크까지.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어떤 시대에서건 내부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욕망을 숨기지 않고, 그 선택에 따른 대가 역시 징벌이든 죽음이든 도망치지 않고 기꺼이 감내한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 시대에 불시착한 여성들 </font></font>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 캐릭터가 특정 배우를 계속해서 찾아가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

“그동안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자주 출연하지 않는 건 항상 여성이 그려지는 방식에서 뭔가 불쾌함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여성 캐릭터들은 언제나 거의 강간을 당하더라고요. 반면 시대극에서 나에게 영감을 주는 캐릭터를 제안받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조금씩 개선되고 있음을 느껴요. 갑자기 저에게 처음 5페이지에 강간당하지 않는 시나리오, 단순히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나 부인이 아닌 현대물의 여성 캐릭터가 들어오기 시작했거든요.”( 2018년 인터뷰 중)

그렇게 배우의 흔들림 없는 선택과 함께 정체된 서사는 조금씩 수정되고, 세상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중세의 드라마, 근대의 사회극, 현대의 뮤지컬, 미래의 공상과학(SF) 영화, 무엇이든 간에 지난 시대의 낡고 부당한 관습을 깨는 여성들은 계속 배우 키라 나이틀리를 찾아갈 것이다. 영화의 어느 골목을 돌 때 나이틀리의 멋진 턱이 보인다면 잠시 속도를 늦추시길, 그리고 험난하지만 아름다운 그 길을 빠짐없이 여행하시길.

<font size="2">*연재를 시작하며</font>
<font size="2">탐험(探險)이란 “미지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 및 성과에의 기대가 결부되어 야기된 인간의 행위”(두산백과사전)라고 정의된다. 지난 20년간 영화기자로 일하며, 특히 배우에 대한 글을 쓰고 인터뷰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게 되었지만, 나에게 배우들은 여전히 미지의 존재다.
한 편의 영화를 둘러싼 다양하고 구체적인 분석, 한 명의 감독에 대한 작가주의적 비평은 넘쳐난다. 그러나 유독 배우와 그들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거나 분석 불가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백은하의 배우들’에서는 한 배우가 카메라 피사체로서 가진 시청각적 장점, 그들이 품고 연마한 선천적 본능과 후천적 기술력, 동료 노동자로서의 협업력과 교감(Communion) 능력, 개별의 삶이 만든 모방 불가의 드라마, 스타로서 산업적 가치, 동시대 아이콘으로서 사회적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각 배우들의 성취를 이야기할 것이다.
취재기자, 편집장을 거쳐 올레(Olleh)TV ‘무비스타 소셜클럽’ ‘백은하의 배우보고서’ 등을 이끌었다. KBS 1라디오 을 진행하고 있다. 책 (해나무), (씨네21북스), (한국영상자료원) 등을 썼다.</font>

<font color="#A6CA37">이 배우의 비트</font>


뱀을 목구멍으로 토하듯이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 화면 갈무리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 화면 갈무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2011)에서 사비나 슈필라인(키라 나이틀리)은 성도착증과 함께 정신불안, 틱장애를 동반한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앓고 있다. 그 내부의 어두운 방을 열기 위해 정신학자 카를 융(마이클 패스벤더)과의 세러피(치료)가 시작된다. 질문을 던지는 융을 등지고 상담의자에 앉은 사비나는 4살 때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폭력을 폭로한다. 융과 사비나의 투숏, 융 시점의 사비나 뒷모습, 그리고 사비나 단독숏을 오가며 진행되는 5분가량의 시퀀스(장면)는 발가벗겨진 채 작은 방에서 당한 아버지의 채찍질, 그러나 어느덧 그 고통을 즐기고 심지어 기다리게 된 한 소녀의 치욕적인 욕망의 근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나이틀리는 내부의 진실을 외부로 폭로하며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마치 내장 속에 똬리를 튼 거대한 뱀을 목구멍으로 토해내는 듯한 행동(사진)으로 이 비트를 완성한다. 턱이 튀어나오고 뒤틀리는 틱 행동에 이어 배를 움켜잡고 등을 구부리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거대한 덩어리의 배출을 필사적으로 저지한다. 이후 꺽꺽거리며 게워내듯 대사를 이어가던 나이틀리는 참다 참다 뱉는 구토처럼 소리친다. 장렬한 몸싸움이 끝나고 ‘그것’이 세상으로 튀어나온 뒤 실신할 것 같은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다 쏟아내고 싶은 욕구와 끝내 감추고 싶은 욕망의 레슬링’이라는 한 인물의 심리를 자신의 온 정신과 육체로 구현하고 시각화한 이 비트는 배우 키라 나이틀리의 온전한 성취다.

<font size="2">*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러시아 연출가이자 연기교육자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정의한 ‘쿠소크’(한 조각)를 미국 현대 영화인들이 ‘Beat’혹은 ‘Bit’로 번역해 쓰고 있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font>


백은하 배우연구소(@ una_labo)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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