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머도, 뼈다귀도, 도끼도 없다.
4월11일 개봉하는 영화 에서 배우 김윤석이 연기하는 중년 남자 ‘대원'은 손에 변변한 무기도 없이 사고만 친다. 10년 전 “야, 4885!”를 외치며 골목을 무섭게 질주했던 이 배우는 여고생들과 하는 짧은 추격전에도 숨을 헐떡거리고 급기야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17살 딸과 아내를 두고 오리고깃집 사장과 바람이 난 것도 모자라 덜컥 아이까지 생겨버린 남자. “당신이 바람피우는 거 세상이 다 알아”라는 문자에 세상 눈치 다 보며 벌벌 떠는, 배짱도 뻔뻔함도 없는 못난 놈. 단언컨대, 현재 충무로에서 이런 역할에 김윤석을 캐스팅할 감독과 제작자는 없다. 감히 그럴 수도 없지만, 굳이 그럴 이유도 없다.
고레에다 기운마저 느껴지는 코미디그러나 스스로 연출을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인 은, 놀랍게도, 온전히 여자들의 영화다. 대원이라는 한 남자 때문에 지옥에 빠진 두 엄마와 두 여고생. 그 네 여성의 의연한 대처와 의외의 연대를 그린 세심하고 사려 깊은 드라마다. 감독 김윤석은 동시대 여성 배우들을 위한 너른 무대를 마련하고, 배우 김윤석을 통해 긴 시간 자각 없는 폭력을 휘둘러온 세대의 남성들을 자비 없이 단죄한다.
그간 김윤석에 대해서는 촬영 현장에서 유독 의견을 많이 내놓는 배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의 감독 데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업계에서는, 얼마나 잘하나 보자고 벼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 작품에서 보여준 캐릭터들을 기반으로 세고 강한 영화가 될 거라고 예상한, 이라는 제목만 듣고 ‘미성년 납치 감금하는 액션 스릴러 아냐?’라고 지레짐작한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윤석이 연출하고 출연한 영화 은 허세가 없어서 허를 찌르고, 농담 없이 시종일관 웃음이 나는 코미디다. 96분이라는 간결한 상영시간 동안 효율적으로 꼼꼼하게 캐릭터와 사건을 쌓아가는, 밑장 빼기 없는 정석의 드라마다. 불륜과 임신이라는 막장드라마 같은 설정으로 시작해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위로와 포용을 보여주는 면에서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무엇보다 등장하는 모든 배우 고유의 결과 화법이 이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없다. 그 영화적 즐거움에 “엠지”(엄지) 손가락과 손모가지를 걸어도 좋다.
감독 김윤석의 담담하고 소박한 연출 방향과 스스로를 우스꽝스러운 역할로 캐스팅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관객이 무뎌서는 아니다. 물론 의 건들건들 다정한 ‘똥주 선생’도 있고 으로 이어지는 인간적인 형사들, 의 먹먹한 멜로의 주인공도 있다.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 만난 배우 김윤석은 대부분 무시무시하고 드라마틱한 남자였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어떤 말과 행동을 해서 무서운 게 아니다. 의 면가도, 《1987》의 박 처장도 등장 이후에 대사보다는 그 시선으로 좌중을 압도한다. 거친 말을 하는 순간이 오히려 부드럽고, 말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이 더 무시무시할 때가 많다. 욕을 내뱉지 않아도, 무기를 들지 않아도, 모두가 받들고 숨죽인다. 하지만 공포스러워 보기 싫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무섭지만 확인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 그렇게 바라본 김윤석을 통과한 인물들의 내부에는 공통적으로 허무가 자리잡고 있다.
에서 20만 년을 살며 인간의 흥망성쇠,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지켜본 요괴 화담은 죽음 앞에 떨고 있는 열한 살 소녀에게 조용히 말한다. “더 살아봐야 결국 아무것도 없단다.” 영겁의 생을 반복한 자의 슬픈 전언, 삶이란 더 살아도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그래도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허무를 안고 있는 인물들. 의 아귀, 의 면가, 의 석태, 의 철주 그리고 《1987》의 박 처장도 그런 허무를 밑바탕으로 자기 연민의 뒷문까지 봉쇄한 남자들이었다. 배우 김윤석은 그 허무의 밑바닥에 자리잡은 무시무시한 악마성의 멱살을 잡고 스크린의 수면 위로 펄떡이며 떠오른다.
아름답고 공감 가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이 그 위로 뺄 것과 더할 것을 결정하는 감성적이고 미학적인 선택이라면, 이해 불가의 악을 표현해낸다는 건 분뇨나 독극물의 내용물을 파악하는 것 같은 고통스럽고 지난한 분석의 과정이다. 김윤석은 자신이 연기한 악인들을 “대부분은 외톨이, 자신만의 신념이 굉장히 강해 세상이 자신에게 내리는 지령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일단 분석을 끝낸 뒤에는 엄청난 비위와 용기로 괴물들을 끝까지 꼭꼭 씹어 삼킨다. 에서 석태가 “그렇게 완전히 더러워져야… 괴물이 되어야, 괴물이 사라지는 거야”라던 대사는 김윤석의 연기를 푸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는 배우 안성기·박중훈·한석규의 시대를 거쳐 송강호·최민식·설경구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김윤석, 황정민, 유해진, 류승룡 등이 합류하면서 충무로는 남성 배우들의 다양성 면에서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동시에 신선하고 가능성 있는 감독들이 탄생했지만 그 지속성과 독립성은 보장되지 않고 여전히 박찬욱·봉준호·이창동을 뛰어넘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충무로 중년 배우들에게는 자신보다 경험치가 떨어지는 새로운 감독들의 가능성을 믿고, 그들에게 이름과 힘을 보태면서 작업을 이어가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노련한 배우들과 미숙한 감독들의 불균형, 감히 한 배우의 신화를 깨고 싶지도, 깰 용기도 없는 제작 환경. 거기에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영웅적 남성 서사는 트렌드를 넘어 과잉으로 치닫고, 사나이들의 피 튀기는 형제애는 점점 피로도를 높여갔다. 어쩌면 영화 속 캐릭터로는 더 이상 추락할 바닥도, 더 이상 비상할 하늘도 없어진 A급 중년 남성 배우들의 선택지는 점점 더 편협해지고 지루해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에 찾아온 김윤석의 감독 데뷔는 한 배우가 자신을 둘러싼 견고한 벽을 향해 휘두르는 절실한 쇠망치질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연출작으로 ‘배우 김윤석 사용 설명서’를 다시 쓰는 셈이다.
연출작으로 ‘김윤석 사용 설명서’ 첨부허무의 바닥을 치고 사라진 괴물들의 장례를 치르고, 그 황무지 위에 다시 영화를 짓는 배우 김윤석. 인간과 시대에 대한 더듬이를 예민하게 세우고, 이 판을 함께 일구어나갈 다양한 동료의 이름들을 든든하게 확보했다. 감독 김윤석의 데뷔작 은 어쩌면 배우 김윤석의 내일을 위한 가장 절실한 생존 키트다.
백은하 배우연구소(@una_labo)소장《1987》 박 처장
섬뜩하면서 슬픈
이미 고문관들의 구타와 전기고문으로 육신이 너덜너덜해진 한병용 앞에 등장한 박 처장은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오래된 가족사진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가는 아크(Arc·피사체 앞이나 뒤에서 130도 정도 도는 것) 숏을 따라 사진 속 ‘동이'라는 인물이 보릿고개 때 다 죽어가는 것을 거두어준 자기 부모님의 은혜를 저버린 채 빨갱이가 되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늘어놓는다. 카메라가 회전을 멈추는 순간, 박 처장은 돌연 아버지를 죽창으로 찔러 죽인 동이에 빙의한 것처럼 “인민의 적! 악질 지주! 반동분자를 지옥으로 보내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기댄 등을 앞으로 해서 앉으며 이내 속삭이듯 말한다. “너레 지옥이 뭔지 알간? 내 식구들이 죽어나가는 판에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는 거, 소래기(소리) 한번 못 지르는 거, 고거이 바로 지옥이야.” 남영동 고문실 옆으로 지나가는 지하철 1호선의 껌뻑이는 불빛 속에 포획된 배우 김윤석의 클로즈업은 대청마루 아래에 숨어 그 모든 살육의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어린 소년의 공포와 무력감을 살벌하게 전달한다. 잠시 허공의 과거로 향했던 시선이 다시 눈앞의 현실로 돌아온 후, 박 처장은 자신의 가족사진 위에 한병용의 가족사진을 조용히 겹쳐 올리며 묻는다. “어카간?”(어떻게 하겠어?)
이 비트는 언뜻 박 처장이라는 인물이 왜 ‘빨갱이’ 잡기에 혈안이 된 악마가 되었는지 그 근원을 이해시키려는 목적처럼 보이지만, 한병용에게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려는 고도의 심리고문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때 김윤석의 눈을 보자. 오른쪽 눈은 섬뜩하게 번쩍이고, 왼쪽 눈에는 눈물이 고여 흐른다. 그가 처절하게 읊던 비극의 가족사는 사실일 수도, 연극일 수도 있다. 배우 김윤석이 완성한 박 처장은 지옥 같은 시대가 잉태한 악마일 수도, 시대를 지옥으로 축조해나가는 악마 같은 부역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무시무시하다. ‘탁’ 하고 치지도 않았는데 ‘억’ 소리가 절로 나는 비트다.
*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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