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언제나 최고다. 이 말은 해가 뜨면 아침이라거나 물이 끓으면 뜨겁다와 같다. 의견이 아니라 팩트(사실)란 말이고, 너무 당연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만약 어떤 예술가가 이 정도 단계의 이견 없는 평가를 받았을 때, 지금까지 성취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자발적인 선택은 두 가지 정도다. 첫째, 은퇴한다. 둘째, 최고 기준점을 스스로 돌파한다.
안전하면서 위험한 선택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세 번이나 받은 배우 대니얼 데이루이스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앤더슨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로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안타깝게도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같은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던 호아킨 피닉스는 여전히 매해 새로운 작품으로 자신의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하지만 영화 를 보고 나면 의문이 든다. 아니, 이 이상이 가능하다고?
DC코믹스의 가장 매력적인 악당 ‘조커’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독일 무성영화 (1928)에 큰 영향을 받아 창조된 캐릭터다. 기괴하게 찢어진 입매로 기억되는 반영웅 조커는 팀 버턴 감독의 (1990)에서 잭 니컬슨,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2009)에서 히스 레저 그리고 (2016)에서 재러드 레토 등 배우와 특징을 바꿔가며 영화화됐던 캐릭터다. 특히 “왜 그렇게 심각해?”(Why so serious?)라는 대사와 함께 강렬한 인상을 남긴 히스 레저의 ‘조커’는 이 젊은 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전설로 박제됐다. 말하자면 많은 배우가 끊임없이 탐내지만 이미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이상, 못하면 욕먹고 잘해도 본전인 역할이었다.
이런 조커의 단독 영화가 제작되고 여기에 호아킨 피닉스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부분 영화팬에게는 비슷한 마음이 스쳤을 것이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조커는 피닉스가 너무나 찰떡같이 잘해낼 것 같은 역할이었다. 누가 봐도 안전한 선택이었고 그렇기에 위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올해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에서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상상 이상의 퍼포먼스로 기존 조커의 잔영을 지워버렸고, 당연한 기대와 필요 없는 우려를 충격과 감탄으로 바꿔버렸다.
10월2일 국내 개봉한 영화 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아서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생계를 위해 도시 한복판에서 광대 분장을 한 채 고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엄마가 불러주는 이름 ‘해피’처럼 타인에게 행복과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스스로도 간절히 웃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아무도 그의 조크(농담)에 웃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요? 세상이 점점 미쳐가요.” 결국 영화 에서는 웃음 한 조각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서 이 남자가 웃으며 살기 위한 선택을 한다. 그의 고된 탈피와 변태의 과정에 가수 지미 듀랜트의 노래 이 무심하고도 찬란하게 흐른다. “웃어요, 당신의 심장이 아파도. 웃어요, 그것이 찢어진다 해도.”(Smile, though your heart is aching. Smile, even though it’s breaking.)
약간 과장한다면 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 구경만으로도 123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영화다. 영화 전체의 감정과 리듬, 음계가 이 배우의 전신을 타고 흐른다. 웃음과 울음을 양쪽 입술에 머금고 병적으로 웃는다. 분노와 환희를 손가락 끝까지 모아 어깨를 흔들고 춤을 춘다. 비극을 왼발에, 희극을 오른발에 싣고 질주한다. 23㎏ 무게를 덜어낸 앙상한 몸에서 비정상적으로 솟아오른 왼쪽 어깨뼈를 비롯해 갈비뼈, 등뼈까지도 표정을 갖고 연기에 동참한다.
친형인 리버 피닉스가 (1988), (1991) 등 어두운 청춘의 초상을 양지처럼 밝은 얼굴로 반사해 그려냈다면, 호아킨 피닉스는 (1995)처럼 상처 입은 청춘들을 응달 속에 갇힌 어린 들짐승처럼 표현해냈다. 호아킨 피닉스에게 대중적인 인기와 인지도를 안겨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서사극 (2000)에서도 그는 용맹스럽고 건강한 영웅 막시무스가 아니라 창백하고 불안한 황제 코모두스를 연기했다. 컴퓨터 운영체계와 사랑에 빠지는 고독한 도시인, 의 테오도르가 그나마 따뜻한 색을 입은 캐릭터였다.
호아킨 피닉스는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의 고통을 수렁에서 건져내기보다 아예 더 차고 깊은 어둠의 심연으로 던져넣는다. 컨트리 가수 조니 캐시의 전기영화 (2005), (2007), (2012) (2015), (2017), (2018) 등의 영화에서 피닉스는 불안, 허무, 죄책감, 상처, 콤플렉스, 트라우마를 혈관에 주사하고 뼈에 새겨 연기한다. 그는 폭력이나 광기를 통해 외부로 표출하면서 만들어지는 카타르시스 대신 그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자신의 육체로 구겨넣는 배우다. 다분히 마조히즘(피학성애)적 방식과 함께 뼈가 꺾이고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기꺼이 선택한다.
매번 연기한 인물 속으로 사라져버리는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 두 편의 영화 제목, 는 아이러니하게 모두 이 배우에게 적용된다. 매번 자신이 연기한 인물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피닉스는 한 번도 여기에 없었다. 동시에 이 무시무시한 배우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 도사린 채 여전히 여기에 있다.
이 배우의 비트
이 배우의 비트의 변기 격파
나뉜 감옥, 격렬한 정사
마치 야생동물처럼 경찰에 포획된 프레디는 이미 갇혀 기다리던 랭커스터(필립 시모어 호프먼) 옆에 나란히 구금된다(사진). 카메라는 하나의 프레임을 잡고 있지만, 설치된 두 감옥 때문에 두 프레임을 병렬시킨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가 시나리오와 연출이 그리고 미술과 촬영이 개입할 수 있는 영화 현장의 세팅이다. 원래 대본에는 이 둘이 투옥된 사정을 알리는 목적으로 배치된 신이었다. 하지만 움직임 없는 카메라와 편집되지 않은 컷 속에서 두 배우는 즉흥적이고 동물적인 퍼포먼스로 이 비트의 목적을 재창조한다.
손이 묶인 채 점점 분노를 통제할 수 없게 된 프레디는 뇌 활동이 멈춘 동물처럼 으르렁거리며 그 작은 감옥을 배회한다. 급기야 철제 침대와 벽에 머리를 들이박고 마침내 발로 변기를 내리쳐 깨부순다. 옆 감옥에 있는 랭커스터는 움직임 없이 꼿꼿하게 서서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보고 듣고 있다가 마침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네의 폐소공포증은 수백만 년 전부터 시작된 거야….” 피닉스가 경찰서에 들어온 순간부터 호프먼이 첫 대사를 시작하기까지 정확히 1분은 감독도 끼어들 수 없는, 편집자도 수정할 수 없는 온전히 배우들만이 지배하는 시간이다. 피닉스가 던진 무언의 액션 비트를 받은 호프먼은 “영혼” “침략자” “권위” “자유” 같은 현학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프레디를 더욱 자극한다. 점점 프레디의 액션은 격해지고 랭커스터의 목소리도 높아지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엔 “웃기지 마, 게으른 놈아” “꺼져(f××× you)” “너를 아끼는 건 나뿐이야” “꺼져” “너한텐 나밖에 없지?” “그래 없다!” 같은 유치하고 원초적인 괴성이 오간다.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은 이 신을 두 배우가 펼치는 치열한 “테니스 경기” 같았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어떤 물리적 접촉도 없는 상태로 심지어 분리된 곳에서 나누는 격렬한 정사 신처럼 느껴진다. 한바탕 광란의 싸움이 끝난 뒤 랭커스터가 변기에 소변을 누는 행위는 이 정사 신의 최종 단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닉스의 육체와 호프먼의 입이 협업한 3분20초의 아찔한 앙상블 비트는, 러닝타임의 반을 바쳐 서성거리며 구애하던 두 동물, 그들이 나눈 최초의 비명이자 최초의 절정이었다.
*비트란 연기 행동(action)의 최소 단위다. 배우의 성취를 집중 조명하는 이 연재에서는 연출과 카메라, 편집의 개념인 숏(shot) 혹은 신(scene) 대신 ‘비트’를 사용한다.
*‘백은하의 배우들’을 이번호로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백은하 배우연구소(@una_labo)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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