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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라도 화내야 한다

배우자 외도에 무력감만 내보인 A
등록 2019-06-05 13:43 수정 2020-05-03 04:29
드라마<풍문으로 들었소>에서 남편 한정호(유준상)의 불륜 이야기에 오열하는 최연희(유호정). sbs 화면 갈무리

드라마<풍문으로 들었소>에서 남편 한정호(유준상)의 불륜 이야기에 오열하는 최연희(유호정). sbs 화면 갈무리

최근 들어 유독 그늘을 드리운 이가 있다면, 위축되고 자존감도 떨어져 보인다면, 별것 아닌 일에도 금방 서러워하는 등 감정 기복이 심하다면, 설상가상 입맛도 의욕도 없는 기색이라면, 그런데도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조심스럽게 배우자나 파트너가 한눈을 판 일이 있는지 물어보면 좋겠다. 스스로 말하기 참으로 힘든 일이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모든 외도가 드라마 버전으로 치닫는 것은 아니다. 배신감은 의외로 잠깐이다. 두고두고 지배하는 것은 무력감이다. 배우자나 파트너의 외도를 겪은 이들의 심리 상태는 때론 자연재해나 전쟁을 겪은 사람에 버금간다.

나는 외도에도 기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술 먹고 하룻밤 사고 친 것을 외도라고 하지는 말자. 그러나 같은 상대와 계속 엮일 만한 조건과 환경을 유지한다면, 그건 외도다. 성관계가 동반되지 않으면 외도가 아닐까? 일정 기간 마음이 온통 팔려 있고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몽땅 쏟는다면 그것도 외도다. 배우자나 파트너에게 지지받지 못하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만남이라면 이에 해당한다. 안 살 거면 모르지만 같이 살 거면 적당히 덮어주는 게 상책이라는 말은, 절대 틀렸다. 귀책 당사자나 그 패밀리의 교활한 술수일 가능성이 크다.

A의 배우자는 처음에는 뻗대다 증거를 대자 시인하고 빌었다. 업무상 술자리 끝에 엉겁결에 몇 차례 잠자리를 한 것뿐이라고 했다. 일이 힘들고 외로워서 눈이 삐었다고 했다. A는 다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믿고 싶었다. 가정에 그림자가 지는 것도 싫었다. 더는 시시콜콜 캐묻지 않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배우자도 그런 A를 고마워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A의 속병은 깊어졌다. 잠시라도 배우자 동선이 파악되지 않으면 의심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그런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비참함에 시달렸다. 뭐가 문제일까.

언뜻 뻔한 스토리로 보이나 행간에 이유가 있다. A는 한 번도 제대로 화내본 적이 없다. 배우자에게 배신감과 분노를 퍼부은 적도 없다. 변함없이 일상을 이어가는 것이 최선이라 믿고 꾸역꾸역 삭이며 감내했다. 화를 내보았다지만 며칠 밖으로 돌고 애꿎은 화분 몇 개 깨뜨린 게 전부였다. 자기감정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A가 금과옥조처럼 따른 것은 ‘이미 덮은 일 자꾸 들쑤시면 좋을 게 없다’는 철 지난 레퍼런스였다.

A는 ‘덮기’ 전에 정확히 사실 확인을 했어야 한다. 자기감정도 충분히 드러냈어야 한다. 내가 겪는 시간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 네가 미안한 만큼 혹은 나를 아끼는 만큼 당연히 내 감정에 알아서 주파수를 맞춰주는 일 따위는 어지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큰 잘못을 했으니 저절로 각성하는 귀책 당사자도 드물다. 따라다니면서 살피고 묻는 이는 더더구나 없다.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는데 어떻게 위로하고 존중할 수 있을까.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다 지난 일 가지고 왜 그러느냐, 사람을 말려 죽일 셈이냐고 적반하장식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 게 인간이다.

자기 행위 때문에 상대가 어떤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지 보고 듣고 느끼지 않으면 반쪽짜리 각성, 하나 마나 한 반성에 그친다. 가장 나쁜 태도는 슬슬 눈치 보다 어느 틈엔가 스스로를 유령처럼 유배시키는 경우이다. 교감은 개뿔 대화조차 없어져버린다.

우리가 관계를 지키는 것은 관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나를 지키고 너를 지키기 위해서다. 지금이라도 A는 화내야 한다. 얼마가 지났든 배우자 외도의 실체를 조목조목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직시해야 내 감정의 갈피가 잡힌다. 살지 안 살지는 그다음에 정해도 늦지 않다. 관계의 진검승부는 배신 여부가 아니라 배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나를 갈아넣어 지킬 관계는 없다. 그런다고 지켜지는 관계도 없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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