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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엄마의 딸

엄마의 착한 맏딸로 자라 사고 치는 딸의 엄마가 된 그이
등록 2019-05-22 11:36 수정 2020-05-03 04:29
한겨레 이종근 기자

한겨레 이종근 기자

아이를 키워봐야 어른이 된다거나 나이 들수록 지혜로워진다는 말은 순 뻥이다. 나를 봐도 팔순인 내 엄마를 봐도 그렇다. 비슷한 맥락에서 엄마와 딸이 친구 같다거나 단짝이라는 말도 나는 영 신뢰가 가지 않는다. 세대도 경험도 다른 모녀간에 그럴 수는 없다.

군수댁 손녀딸인 그이는 엄마 하라는 대로 하고 자랐고 결혼해서 애 낳고도 엄마 하라는 대로 하며 살았다. 그 엄마의 착한 맏딸이다. 나름 안정된 중산층의 삶을 사는 그이가 인감은커녕 제 이름으로 된 은행 계좌 하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적잖이 놀랐는데, 이십 대 초반인 딸이 사고 친 뒤치다꺼리를 팔순 가까운 제 엄마에게 맡기는 걸 보고는 더 많이 놀랐다. 음주와 가무와 기타 등등 각종 중독성 장르에 빠져 사는 딸이 최근엔 대형 차사고를 냈다. 문제의 차도 그 엄마 명의였다. 군수댁 딸인 분 말이다. 보험료도 그분이 내주고 있었단다.

동네에서 장 보다 만나 가볍게 안부를 묻다가, 꼼짝없이 그간의 일을 들어야 했다. 난감했다. 장바구니도 무거웠지만 당최 어느 지점에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람은 안 다쳤고 공공시설만 대차게 부순 모양이다. 어머니가 놀라지 않으셨냐, 물었더니 회춘이라도 한 것처럼 쌩쌩 일을 처리하더라고 했다. 들어보니 그이의 손아래 남동생인 ‘그 엄마의 아들’을 동원해 처리한 것 같았다. 사고 친 당사자의 아빠인 ‘그 엄마의 사위’는 언제나 뒷순위라더니 이번 사고 수습 과정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기세등등한 장모 아래 사는 사위가 얼마나 제자리를 못 찾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꼽힐 만하다. 말 안 듣는 제 딸 잡을 사람은 할머니인 제 엄마뿐이라는데 내 보기에 그 딸이 긁고 다니는 카드만 끊어버리면 간단한 문제 같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어른이 아니다. 그 어머니가 딸네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돈줄을 쥐고 있어서다. 그이의 남편 벌이로도 부족함 없이 살 만하건만 귀한 딸 더 잘살게 해주려는 어머니의 집념에 번번이 지는 기색이다. 그러면서 그이도 은근슬쩍 묻어갔던 건 아닐까. 딱히 욕심부리는 성격은 아닌 것 같지만 그건 욕심이 없어서라기보다 부리기도 전에 엄마가 알아서 챙겨준 탓이 아닐까 싶다.

평생 엄마에게 쥐여산 게 억울해서인지 그이는 딸을 심하게 떠받들어 키웠다. 현관에 애가 들어서면 가방부터 받아 챙기는 엄마였다. 성인이 된 뒤로는 클럽에서 노는 애를 엄마 아빠가 새벽까지 기다렸다 데려오는 눈치였다. 외출 금지를 하네, 머리를 깎네, 가출을 하네, 고색창연한 에피소드가 간간이 들려왔다. 무슨 정보를 막장 드라마에서만 얻었는지 뒤늦게 허둥지둥 별짓을 다 해본 바에 지나지 않았다.

평생 ‘그 엄마의 딸’로 살아온 그이는 ‘그 딸의 엄마’로 산다. 지인들과 점심 먹는 1시간 남짓한 자리에서도 그 엄마에게 한 번, 그 딸에게 한 번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는 누구랑 뭐 먹냐 꼬치꼬치 묻고, 그 시간에 일어난 딸은 입고 나갈 자기 옷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게 용건이다. 엄마와도 딸과도 늘 붙어 있고 모든 것을 의논하지만 친구 같다거나 단짝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종속된 삶 같다.

유난스러운 성정이나 조건이 아니라도 엄마와 딸은 자칫하면 얽히기 쉬운 관계다. 감정적으로도 생활적으로도 그렇다. 물론 특수한 상황에 놓인 모녀 중에는 동지 같은 관계를 맺는 이들도 있다. 어디까지나 서로 주체적일 때 가능한 일이다. 대체로는 한쪽이 쥐락펴락하거나 다른 쪽이 여러 이유로 쥐여사는 경우가 더 많다.

혹시라도 ‘아, 이건 아니야’ 생각이 든다면, 더 늦기 전에 그때라도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와 딸이 꼭 친하지 않으면 어떤가.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 되는 것을. 이해받고 존중받기 위해서라도 경제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독립하는 게 우선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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