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시작된 지난 1월21일 아이들이 달려나가고 있다. 한겨레
양육의 외주화 중이다. 지인들과 1박2일 부산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 중간에 아이가 한 지인을 따라 기차에서 내렸다. 한 밤만 자고 담날 기차 태워주면 온다더니, 사흘째 사진만 전송돼 온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미리 받아온 고구마색 체육복을 단벌로 입고 갔는데 입학하기도 전에 호박색으로 닳을까 걱정이다.
지인 집에는 주인의식이 강한 개와 비교적 넓은 마당, 그리고 무한한 자유가 있다. 회사가 가까운 지인이 밥 해놓고 출근하면 챙겨 먹고 놀다 점심시간에 다니러 오면 같이 점심 먹고 퇴근 뒤 저녁시간 함께 보내고…. 틈틈이 동네 길 잘 아는 개에게 끌려 산책하고 컴퓨터 실컷 하며 뒹굴뒹굴하는 기색이다. 지인에게 연령대별 다양한 ‘쓰레기 인간들’에 대한 밥상머리 특강을 들을 건 안 봐도 비디오다. 산교육이 따로 없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그냥 둔다. 애 없이 지내는 내 기쁨 때문은 결코, 절대, 아니다.
방학 때 일가친척네서 ‘삐대는’ 것은 우리 세대의 유구한 전통이었는데 지금 아이들에게는 거의 역사 속 일인 듯하다. 많은 아이가 1. 학원, 2. 보호자의 염려 혹은 염치에 매여지내서 그런 것 같다. 1과 2가 아니라도 내 아이처럼 3. 마땅히 갈 집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다. 양가 조부모는 심히 연로하셨고, 사촌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다 몇 집은 ‘스카이캐슬스러운’ 분위기라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럴 때 쓸 수 있는 게 ‘지인 카드’인 것을 새롭게 발견했다. 지인은 엄마 체험, 나는 싱글 체험, 아이는 강아지 체험이다.
예쁘고 옷 잘 입던 내 고모는 살림은 정말 못했는데 어린 시절 고모네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곤로’에 달걀볶음과 (엄마는 안 주던) 분홍소시지를 원 없이 구워 빵에 올려 먹은 기억이 난다. 프라이팬이 더러워 부담스러웠는데, 고모가 미국 사람들은 아침을 그렇게 먹는다고 했다. 미국 사람들은 더럽게 먹는 줄 알았다. 솜씨가 좋았던 이웃 아주머니 댁에서는 종이를 접어 오려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늘 앞치마 차림의 조신하던 그분이 나중에 돈을 떼어먹었다고 내 엄마는 두고두고 욕하지만 나는 다정한 미소가 두고두고 생각난다. 내 외숙모는 바지런한 분이었다. 방학 때면 버스 타고 우르르 놀러가 몇 날 며칠 좁은 집에서 사촌들과 복닥거리며 논 기억이 생생하다. 외숙모가 10원을 주면 만화방에 갔다. 기억 속 그분들은 덕담도 많이 주었다. 복이 많다, 바르다, 용감하다…. 지금 생각하면 계량화하거나 검증하기 힘든 ‘아무 말’들이다. 별다른 기대나 요구가 실리지 않은 말이었기에 더 좋았다. 부모 아닌 신뢰할 만한 어른에게서 맛난 음식과 즐거운 놀이와 함께 듣는 그런 말들은… 뭐랄까, 어린 피부 깊숙이 확 꽂혀 들어온다. 그래서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확실히 애랑 개(내 경우에는 배우자 포함)는 잘 먹이고 잘 놀리면 된다.
아이들의 생활 동선이 터무니없이 짧다. 한 동네,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보호자가 차로 태워주기 일쑤다. 튼튼해지라 운동 보내면서도 걷게 하지 않고 태워 간다. 시간 부족과 불안, 무엇보다 습관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동선이 짧으면 아이가 맺는 관계도 보는 세계도 빤해지게 마련이다. 성장기 아이는 양육자가 쳐준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양육자의 믿음을 넘어서지 못한다. 보이듯 보이지 않듯 크게 멀리 생활 영역을 넓혀주는 일은 방학을 맞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근사한 일이다. 나의 관념과 세계를 넓히는 도전이기도 하다. 여건 맞는 이웃과 지인에게 ‘밥만 주면 됨, 반려동물 잘 돌봄’ 특징을 적어 ‘숙박형 아이 파견 가능/ 아이 파견 환영’ 문자를 돌려본다. 나중에 효도할 거라는 말도 덧붙여.
고모와 외숙모에게 가끔 용돈을 드린다. 소식 끊긴 이웃 아주머니께는 안녕을 기원한다. 길든 짧든 한 시절 나를 키워준 다른 엄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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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