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여섯 살 때였나. 집 가까운 지하철역을 지나다 문득 “엄마는 이렇게 회사가 가까웠는데 왜 그렇게 만날 늦게 왔어?” 하고 물었다. 뭔 소리인가 했는데 아이는 그때까지 지하철역 내려가는 계단(아이 표현으로는 컴컴한 구멍)을 엄마 회사 입구로 알고 있었다. 말은 곧잘 해도 천지 분간은 잘 안 될 때였으니.
나는 아이가 네 살 때까지 직장생활을 했다. 아침마다 돌봐주시는 분 손잡고 엄마 배웅한다고 따라와서는 그 구멍 앞에서 울고불고 발버둥 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밤에는 제 아비 등에 업혀 그 구멍 앞에서 하염없이 목 빼고 기다렸다. 나는 일 때문에 자주 귀가가 늦었는데 가끔은 애 보기 싫어서 늦게 오기도 했다. 당시 출퇴근하며 아이를 돌봐주시던 아주머니의 근무 시간이 어떤 날은 18시간을 찍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서툴렀다. 엄마 회사는 어디쯤이고 네가 가본 어느 곳에 견주면 거리가 몇 배쯤 되고 오가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차근차근 일러줄 것을.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아이는 나름의 감을 잡고 안도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줄곧 봐주시던 분 손에만 맡겨도 되었을걸 “애 심심할까봐” “자리 잘 안 나니까” 등 주변 말만 듣고는 두 돌도 안 된 아이를 시립 어린이집에 떠밀어넣은 것은 지금도 후회된다. 그 시절 아이 사진에는 웃는 표정이 없다.
게다가 나는 바쁜 엄마였다. 회사 일에 몸도 매였지만 마음은 더 매였다. 바쁜 엄마는 종종 본의 아니게 나쁜 엄마가 된다. 아주머니도 이웃들도 나에게 “애를 너무 큰 애처럼 대한다”고 충고했다. 나는 단골 레퍼토리처럼 이렇게 호통치곤 했다. “말귀 다 알아들으면서 왜 처신을 똑바로 하지 않아!” 아놔, 그러니까 애지.
회사를 그만두면 달라질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오래 붙어 있으니 화낼 일이 더 많았다. 몇 년 뒤 어느 날 초등 저학년이던 아이가 내게 항변조로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초등학생은 처음이잖아. 처음인데 어떻게 잘해!” 초등학생씩이나 되어서 왜 이러냐고 한소리 듣던 중이었다. 나는 순간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비어져 나왔다. 지지고 볶는 새 이렇게 컸구나. 아이 말이 맞았다. 아이는 자식 노릇도 처음이다. 내가 엄마 노릇이 처음이듯이.
어린 시절 나는 일과 사교에 바빠 집을 비우는 엄마가 싫었다. 오빠와 언니들은 그런 엄마에게 결핍을 느끼지 않았지만 나는 유독 민감했던 것 같다. 학교 마치고 집에 들어가며 “엄마~” 부르는 친구들이 그리 부러웠다. 엄마의 설레발과 능력 덕분에 비교적 쪼들리지 않고 사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잘나고 능력 있는 엄마보다는 못나도 곁에 있는 엄마가 더 좋았다.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다. (물론 곁에서 버럭 하느니 회사 다니며 다정한 엄마가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난 9년간 900번은 한 것 같지만, 그래도 회사 다니며 버럭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며 계속 버럭 했다.)
한 지인은 돈을 안 버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애 아빠 벌이로도 생활이 되고 심지어 썩 적성에 맞는 일도 아닌데 맞벌이를 고수한다. 어릴 때부터 넉넉지 않은 살림과 무능한 엄마가 싫었단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헤어지지 못하고 쥐여 사는 엄마, 자식들에게 큰소리 한번 못 치고 참고서값 한번 제대로 못 주는 엄마가 뼈저리게 싫었단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어린아이가 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동시에 내 속의 아이를 키우는 일인 것 같다. 가가호호 처지와 형편은 다르지만 우리는 이미 그러고 있다. 가장 간절한 것을 쥐기 위해, 가장 피하고 싶은 것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날마다 마음을 다지며 사력을 다해 일하고 아이를 키우는지 모른다. 그 시절 내 엄마도 당신의 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에게, 나 자신에게, 더 느긋해져도 된다. 어떤 선택이든 괜찮다. 우리 모두 처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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