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막바지에 불거진 유력 후보의 거짓말 스캔들을 보다가 “족구하라 그래(1.5배속)”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창 표현에 민감한 틴에이저 딸아이가 내막을 묻기에 아는 대로 ‘교육적으로’ 설명했더니 아이가 ‘조카크레파스십팔색’ 유의 몇 가지 더 적절한 표현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요즘 아이들의 버라이어티한 욕설 세계를 잠시 실시간 감상했다. 롯데리아 앞에서 껌 씹던 내 성장기보다 훨씬 창의적이다. 남편은 옆에서 “모녀의 대화가 참으로 주옥같다(1.5배속)”며 무서워했다.
양아치를 양아치라 하기 힘든 공직선거의 계절이 지났다. 엇갈린 두 정치인의 행보를 보았다. 제주도지사 당선인 원희룡과 경기도지사 낙선인 남경필이다. 원희룡은 ‘흙수저’, 남경필(사진)은 ‘금수저’ 출신이라 들판(무소속)과 온실(자유한국당)로 대비되는 선택을 했다고도 하던데, 나는 자기 이름값을 믿고 못 믿은 차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직업직종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나잇대 아재들이 ‘자기 가치’를 스스로 찾기란 참으로 힘들다. 허덕허덕 밥벌이를 한 사람도,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른 나이부터 정계에 입문해 ‘슈드 비’(should be·‘나는 언제나 이러이러해야 한다’)의 삶을 살아온 처지이니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삶을 상상하기 더 힘들었으려나.
경기도민인 나는 남경필이 시도했던 괜찮은 정책들을 알고 있고 협치와 연정의 자세를 기억한다. 남경필이 무소속이었다면 결과는 꽤 달랐을 것이라는 주변 유권자도 적지 않다. 어쩌자고 자유한국당을 끝내 포기 못한 것일까. 설마 한 번 버린 적 있는 망조 든 집안의 개혁 적자를 자임한 건 아닐 테고. 겁이 났을까, 아니면 떠밀렸을까. 논리에서도, 흐름을 읽는 촉에서도 잘못됐다. 그가 단독자로서 자신을 믿고 아버지의 정치, 집안의 정치 말고 ‘자기 정치’를 하면 좋겠다. 그 또래 장삼이사 아재들과 겹쳐보여 마음이 쓰인다.
생애주기상 정신없이 달려오다 문득 몸도 마음도 꺾어진 시기에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표정으로 방황하는 아재들을 종종 본다. 주말 마트에서 “또 애 운동화 신은 거야? 그거 신지 말랬잖아!” 타박을 들으면서도 히죽거리며 아내를 졸졸 쫓아다니거나, 서점이나 굿즈 매장에서 큰소리로 “와, 이런 것도 있네. 이것 좀 봐” 하면서 아이가 엄마 부르듯 옆 사람을 찾는다. 동행인의 주책없는 태도에 이미 난감해질 대로 난감해진 상대는 매대 아래 가려놓은 천이라도 들춰서 숨고 싶은 표정이다.
가족이랑 시간을 보내니까 좋고, 아들의 옷이나 운동화가 근사해 보이며, 새삼 장보는 게 재미있고, 서점에라도 가면 신기한 것 투성이인 아재의 삶은… 빠른 산업화와 정신없는 세계화를 지나 아등바등 경쟁을 거쳐 종국에는 저성장에 다다른, 시대의 그늘이다. 웃프다.
자신을 못 믿다 못해 아예 잃어버린 아재들은 늘 외롭고 불안하다. 무슨 일을 하고 누구랑 친분이 있는 것으로만 자신을 설명한다. 이런 아재들일수록 익숙한 패턴에 매달린다. 동네 뒷산조차 떼로 다녀야 하고, 취미생활도 동호인 모임을 통해서 해야 한다. 정작 단둘이 누군가와 오붓이 있으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누군가를 불러내지 못해 안달하다가 괜히 큰소리로 ‘우하하하’ 웃다가 끝내 과묵, 소심해진다. 그런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고 살짝 귓속말해주고 싶다.
평생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를 맺어본 적 없으니 그 어디에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다. 걸음마 떼듯 관계에도 경험이 필요하다. 근력도 차츰차츰 붙는다. 수십 년 전 추억을 술안주로 씹어대는 동창이나 돌아서면 샘내고 탓하는 전(현) 직장 관계자들 신경 쓰지 말고, 외따로 버림받은 기분 속으로 괜히 숨어들지 말고, 당장 늦은 밤 음식물 쓰레기 버리면서 만나는 이웃의 아재들과 좋은 마음으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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