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호르몬의 몹쓸 농간. 옳은 소리라도 좀 길게 한다 싶으면 영락없이 한 옥타브 낮은 어조로 “어”라는 답이 돌아온다. 두어 번 반복될라치면 대답은 점점 더 낮고 짧아진다. 교과서나 준비물은 놓고 가도 틴트나 립밤은 챙겨가는 소녀시대에 접어든 내 딸은 점점 다른 아이가 되어간다.
격변의 현장에서, 아이와 잘 지내기 위한 방법을 연구 중이다. 무엇보다 평화가 중요하다. ‘밀당’을 잘하면 되겠지, 여겼다. 하지만 나는 집요하지도 이기적이지도 못하다. 한번씩 울컥하다가 약점만 잡힌다. (밀당의 고수들은 감정이 손쉽게 변하며 놀라우리만치 자기중심적이다. 한마디로 ‘트럼프스럽다’. 그 점에서 이미 성장호르몬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아이가 훨씬 유리하다.) 아무튼 나 같은 캐릭터가 ‘밀당’을 하기엔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다.
그럼 어쩐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헌신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많이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둘 다 하면 할수록 나만 기분 나빠지니까.
‘왜 때문’일까. 왜 이제는 예쁘지 않은 걸까. 그나마 여자아이라서 나으려나. 적어도 냄새는 안 나니까. 아이 아비는 지레 겁먹고 있다. 이러다 자식한테 듣는 말이 단 세 마디가 아닐까 하는. “뭐.” “왜.” “가.” 대체 학교에서는 뭘 가르치는 거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마 선생님은 같은 마음으로 가정에서는 뭘 가르치는지 궁금해하시겠지.
본의 아니게 부부애만 돈독해지고 있다. 정확히는 전우애에 가깝다. 한 이웃은 자기만의 노하우를 일러줬다. “쥐어패는 상상을 해봐. 훨씬 기분이 좋아져.” 다른 이웃은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가면 달라져. 우리 애도 고등학생이 되니까 나한테 욕은 안 하더라고.” 하도 문을 쾅쾅 닫아 문짝을 떼놓은 집도 있다. 어느 집 아빠는 아이와 실랑이 끝에 한밤중에 집을 뛰쳐나가 공원을 배회하던 중 지나가는 청소년에게 담배를 얻어 피웠다지. 그 청소년 기특하게도 “아저씨 여기 혼자 계시면 위험해요”라고 말해줬단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간증이 넘쳐난다.
한창 놀아야 하는데 실컷 못 놀아서 성격이 나빠지나 싶기도 하다. 어릴 때도 바깥놀이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날이면 몸이 쑤시는지 저녁 밥상에서 식탁 다리에 매달려 있던 아이였다. 안 되겠다. 감정을 최대한 자제한 채 아이의 행동 유형을 관찰해보았다.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친구관계에 따라 바뀌었다. 피곤한 날이면 사소한 일에도 심통 내고 죽이 맞는 친구랑 신나게 논 날에는 빤짝빤짝 빛이 나는 식이랄까. 좀 전까지 시무룩했는데 샤워하다 흥얼거리더니 마루에 나와서는 옷도 다 입지 않은 채 춤을 춘다. 무아지경이다. 미친 게 아니라 그냥 크는 거다.
심하게 말썽꾸러기인 사춘기 아이를 부모가 늘 믿는다 믿는다 하며 키웠더니 진짜 아이가 멀쩡해졌단다. 그 엄마에게 “속 많이 끓이셨을 텐데 어찌 그리 한결같이 믿을 수 있었나” 비결을 묻자 엄마의 대답은 이랬단다. “나 저 자식 한 번도 믿은 적 없어요. 믿는 척한 거뿐이지.” 훅 와닿는다.
오늘 말 다르고 내일 말 다른 아이의 친구 품평에 어제도 그렇구나 오늘도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려준다. 친구랑 놀러 나간다면 안전하게 잘 놀다 오라는 당부만 하고, 친구가 놀러 오면 맛난 간식 잔뜩 주고 알아서 안방에 ‘셀프 감금’한 정도가 내 최선의 협조다. 옆집 아이라면 크는 과정이려니 다 이해될 일이 내 아이라 유독 이해되지 않는다. 아이를 이웃(집 아이)처럼 사랑할 날을 고대한다.
그리고 정말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 도(道) 중에 가장 높은 경지가 ‘냅도’라는데, 있는 듯 없는 듯 넓게 울타리를 쳐주마. 넘치는 네 호르몬은 네가 감당하렴. 나는 줄어드는 내 호르몬이나 관리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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