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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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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의 있는’ 거리를 두자

고부간 지켜야 할 최선의 예의…

상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걸 인정하고 도와주기  
등록 2018-05-15 17:28 수정 2020-05-03 04:28
손잡은 김정숙(오른쪽)여사와 리설주 여사의 모습. 한국공동사진기사단

손잡은 김정숙(오른쪽)여사와 리설주 여사의 모습. 한국공동사진기사단

김정숙-리설주 만남을 ‘다정한 고부간’으로 묘사하는 언론은 보이지 않았다. 남북 정상 간의 대화 모습, 두 여사의 나이 등을 생각하면 그리 표현해도 무방할 듯한데 말이다. 설마 ‘고부간’이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어감이라서 자기 검열을? 그럴 리가. ‘학교 재량휴업일, 직장맘은 속앓이’ 이런 표현을 여전히 대놓고 쓰는 게 우리 언론이다. 마치 애는 엄마만 키우기로 헌법에 적혀 있기라도 하듯이. 그게 아니면 고부간이 다정한 것은 아우성이 소리 없는 것 같은 형용모순이라서일까.

개인적으로 김정숙 여사를 1등 시어머니감으로 꼽는다. 본인의 배우자에게 ‘꽂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들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 상대적으로 자식에게는 관심이 덜하고 그 배우자에게는 더 덜하겠지. 관심이 덜하니 ‘오버’할 일도 없다. 깜냥껏 정중하고 깍듯한 관계가 올바른 고부간이 나아갈 자세라고 주장하는 바다. 김 여사를 장모님 자리에 놓아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장서(장모와 사위) 갈등은 어머니의 지나친 집착과 간섭에서 시작된다. 이런 집안일수록 아버지들은 붙박이장에 가깝다. 붙박이장을 꿀 떨어지는 눈으로 보는 어머니는 없다. 새로 장만했다면 모를까.

내 시어머니는 겁이 많은 성품인데다 기본적으로 며느리를 무서워하는 탓에 나로선 감사하다. 시어머니는 집안 행사에 비교적 좋은 선택을 해왔다. 몇 년 전 추석 차례를 없앴고 올해부터는 설 차례상도 안 차린다. 대신 성당에 가서 합동으로 차례를 지내고 온다. 일 년 열두 번 지내던 제사도 시즌별로 묶은 눈치다.

생각해보니 나도 좀 일조했다. 추석 차례에 연거푸 안 내려갔다. 남편은 가급적 갔다. 나는 대신 내 부모를 만나거나 놀았다. 내가 안 내려가길 몇 년, 시부모님은 아들들에게 “추석에는 처가에 가라”고 했다. 대신 “섭섭하니” 붐비는 연휴 피해 성묘 다녀오는 길에 시아버지 형제분들 내외, 그 자녀들까지 근처 숙소를 빌려 하룻밤 놀기로 했다고 남편을 통해 알려왔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가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몇 차례 참석했다. 시어머니는 내가 안 온 것을 서운해했다. “시숙모가 닭을 몇 마리나 잡아왔는데 너를 먹이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어느 해인가는 “너 좋아하는 회를 잔뜩 떠왔는데 네 생각이 많이 났다”고 했다. 나는 다정하게 말씀드렸다. 좁고 낯선 콘도나 펜션에서 별로 친하지도 않은 시삼촌 내외분들과 그 자녀들까지 복닥거리는 게 내 처지에서 좋을 리 있겠냐고. (닭 잡은 솥이며 비린내 나는 회 접시는 누가 치우느냐는 말은 삼켰다.) 어머니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정확히 전달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 어차피 한번 없앤 제사나 행사는 확실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이니. 종부인 시어머니가 늙고 힘들어져 50년 넘게 홀로 지어온 의무를 하나씩 내려놓을 때 집안의 저항이 나름 격렬했으나, 누구도 그것을 되살려 대신 짊어지지는 않았다.

고부간, 장서간 중요한 것은 ‘격의 있는’ 적절한 거리감이다. 정확한 선을 긋고 필요하면 투쟁해야 한다. 거리감은 저절로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상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인정하고 도와주는 게 내 배우자를 낳아주고 길러준 이에 대한, 귀한 내 자식과 사는 이에 대한 최선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내 시어머니는 예쁜 옷을 좋아하고 나는 맛난 음식을 좋아한다. 명절 아침 성당에 다니지 않는 자식들 내외 누구에게도 같이 가자 하지 않은 채 예쁘게 차려입고 집을 나서는 시어머니께 나는 물개박수를 쳐드렸다. 나중에 천당 가실 거예요. 저는 지금 놀러나갈게요. 착한 여자는 죽어서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살아서 어디든 간다는 것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다. 어머니도 얼마든지 더 나빠질 수 있으니까. 파이팅.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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