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책방을 체험하다
② 지역을 살리다
③ 오래된 미래를 보다
문을 열자 책 냄새가 훅 풍겨왔다. 오로지 책만 파는 책방이 품은 향기. 100여 평의 너른 공간에 책 3만여 권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강원도 속초시 수복로에 있는 ‘동아서점’. 1956년 문을 연 이곳은 61년간 3대째 이어져온 ‘뿌리 깊은 책방’이다.
가족 모두 책방에10월18일 찾은 동아서점에는 아버지와 아들, 김일수(65) 대표와 김영건(31) 매니저가 함께 있었다. 아버지 김일수 대표는 참고서 관리를 하고, 아들 김영건 매니저는 단행본 관리와 납품 등의 업무를 한다. 서로의 장점을 살려 업무 분담을 한 것이다.
어릴 때 서점 창고에서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김 매니저는 이제 어엿한 책방지기다. 어린 시절엔 자신이 지금처럼 아버지와 함께 책방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김 매니저 인생의 시간이 서점에 맞춰진 건 3년 전부터였다. 아버지는 서점이 폐업 위기에 몰리자 그에게 “서점해 볼 생각 있느냐? 운영해보겠냐”고 제안했다. 그가 아들 삼형제 중 가장 책을 좋아해서다. 그는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울에서 공연기획 일을 하던 그는 9년 만에 고향 속초에 내려왔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망해가는 서점을 살리기 위해 변화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기존 서점에 있던 책 1만여 권을 모두 반납한 뒤 새로운 책으로 교체하고 서점 규모를 세 배로 늘렸다. 등의 책을 모은 ‘애주가의 서재’ 코너 등을 만들고, 책 표지가 보이도록 눕혀 진열하는 평대 서가도 꾸몄다. 책을 쌓아놓기만 하던 서점에서 북 큐레이션이 돋보이는 곳으로 탈바꿈을 했다. 넓은 통유리창, 일자형 테이블이 있어 책 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했다. 변화된 시대에 변화된 시각으로, 새로운 콘텐츠와 새로운 공간을 연결하겠다는 강력한 뜻을 책 공간 배치에 심은 것이다.
하지만 종합서점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지키고 있다. 동아서점에는 요리책, 수험서, 독립출판물, 소설책, 과학책 등 출간되는 모든 분야의 책이 있다. 그런 까닭에 구비된 책들의 얼굴만큼 방문하는 이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주인장처럼 손님도 속초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노인 세대부터 젊은이까지 ‘3대’가 찾아온다.
김 매니저는 “나의 문화적 취향만을 반영한 서점을 열기보다 아버지와 함께 운영하는 서점을 한다는 게 기본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나 혼자만의 서점이 아니니까요. 이 서점의 카운터는 아버지도 나도 앉아 있을 공간으로 만들어야 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단골인) 오랜 시간 서점을 찾아온 손님들도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종합서점이라는 정체성을 이어가자고 결심한 거예요.”
이제는 서점지기가 천직인 것 같은 내공을 보여주는 김 대표 역시 아들처럼 “어쩌다보니 서점을” 맡게 됐다. 1978년, 나이 25살 때였다.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장남인 제가 서점을 운영하게 됐어요. 저도 아들처럼 서울 생활을 접고 와서 이곳에 눌러앉은 거죠. 대학에선 화학을 전공했는데….” 청춘의 긴 시간을 서점 안에서 보낸 아버지. 전공은 화학이었지만 아버지의 꿈도 애초부터 서점과 멀리 있지 않았다. “음…, 막연하게 꿔온 꿈이라면 작가였지. 준비는 안 했지만. (웃음)”
인생은 때론 예상치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곳에서 새로운 운명 같은 삶이 펼쳐진다. ‘어쩌다 서점인’이 된 김영건씨는 어쩌다 운명의 짝도 이곳에서 만났다. 아내 이수현씨는 서점의 단골손님이었다. 부부는 7개월 연애 끝에 지난해 결혼했다. 그리고 7개월 전 딸이 태어났다. 수현씨도 아이를 안고 서점에 와 일한다. 서점의 디자인 쪽 일을 맡고 있다. 서점 기둥에 붙은 ‘아주 사적인 속초 여행 지도’는 수현씨 작품이다. “가족 모두가 서점에서 일해요. 가족 경영이죠. 만약 (서점이) 망하면 우리 가족 다 망하는 거죠. 그런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나봐요. 그래서 (서점 운영에) 부담을 많이 느껴요.”
인구 8만 명의 소도시 속초는 산과 바다, 호수를 모두 만날 수 있는 관광도시다. 그 때문에 토박이뿐 아니라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동아서점에도 2∼3년 전부터 여행객이 찾아오고 있다. 이날도 서울에서 속초로 혼자 여행 온 김경은(25)씨가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인터넷에서 동아서점 얘길 보고 한번 들러야지 하던 차에 방문했다”고 말했다. “대형서점과 다른 새로운 느낌이 드네요. 여행 와서 이렇게 책에 둘러싸여 있는 것도 좋고요.”
“어쩌다보니 서점을”김 매니저는 지난 2월 서점 운영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를 담은 책 를 펴냈다. 이 책은 동아서점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에는 “서점 호황기를 온몸으로 겪고 21세기에 당도한” 아버지와 초보 서점인 아들이 서점을 함께 운영하며 겪은 소소한 이야기가 가득 담겼다. 서점 이야기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 매니저는 “서점에서 함께 일하며 아버지가 그동안 몰랐던 저를 발견하신 것 같아요. 이렇게 까칠하고 성격이 모난 줄 모르셨다고 하세요. (웃음)”라고 말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아들은 기특하고 듬직한 존재다. “아들은 하나라도 흐트러지는 걸 못 보는 완벽주의자예요. 난 그때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대충 해도 되지 않나 생각하는데. 책 진열하는 거 보면 엄청 꼼꼼해요. 그렇게 난 절대 못해요. (웃음)” 아들에게도 아버지는 ‘존재’만으로 든든한 커다란 언덕이다. “예전 단골을 맞을 때, 출판사와 거래할 때 보면 40년 동안 서점을 운영해온 아버지의 연륜이 느껴져요.”
서점인으로 산 지난 3년의 시간이 김 매니저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서점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됐어요. 3년 전엔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속초로 내려와 가족과 일하니 밀착된 관계를 맺은 느낌이에요.” 함께 일하다보니 많이 싸우기도 하고, 그를 통해 서로의 진면목을 아는 순간이 이어졌다. 아들은 그 경험을 통해 “이제 애매한 가족이 아닌 진짜 가족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동아서점엔 쉬는 날이 없다. 매일 서점 문을 열고 일하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무겁다. “책방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아들에게 먹고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생겼으면 해요. 그래야 이 일에 회의가 안 느껴지는데….” 쉽지 않은 길을 가는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책방 운영은 마라톤 경주 같아요. 꾸준히 해야 하죠. 그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나도 원래 끈기가 있진 않았는데 (서점을 운영)하다보니 인내심이 생겼어요.”
마라톤처럼 꾸준히아버지와 아들은 서점을 어떤 모습으로 키워나갈까. “문화 인프라가 적은 이 지역의 문화 공간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속초라는 작은 도시에 3대를 이어 100년까지 가는 서점이면 더욱 좋고요.”(아버지 김일수) “아, 100년이라. 하루하루 버티는 것 자체가 워낙 쉽지 않아요. 그저 편하게 올 수 있는 서점, 항상 가고 싶은 서점이었으면 해요. 사람들이 한국의 서점을 말할 때마다 동아서점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아들 김영건)
다른 듯 닮은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오늘 하루도 동아서점을 함께 지켜나가고 있다.
“강원도 어느 바닷마을 서점에서 책이 팔려봤자 얼마나 팔리겠냐마는, 책에 대한 당신의 그 애정 어린 마음 덕분에 우리 서점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중에서)
속초=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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