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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

체포당한 혁명가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폭탄 반입 기도해 검거된 중립공산당 핵심 김한
조선 자유와 해방 당위 설파한 최후진술로 보복

제1175호
등록 : 2017-08-15 22:24 수정 : 2017-08-1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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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조차 부당한 제국주의 권력에 저항한 아나키스트 박열처럼, 김한은 피고인 최후진술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정면 비판하다 판사의 보복 선고를 받았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공

검거 선풍이 불었다. 1923년 1월17일 서울 삼판통(후암동)과 1월22일 효제동 총격전이 발발한 뒤 일본 경찰은 연루자 체포에 혈안이 됐다. 총격전의 주인공 김상옥이 이미 사망했는데도 그랬다. 현직 경관 4명이 사살당하고 총상을 입은 것에 경찰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품었다. 김상옥과 조금이라도 접촉했거나 관련된 사람이라면 옥석을 가릴 것 없이 마구 잡아들였다.

김한(金翰)도 그 속에 있었다. 한때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을 지냈고, 합법적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 상임위원으로 재임 중이던 그는 37살의 팔팔한 장년이었다. 그가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된 것은 1월28일이었다.① 효제동 총격전이 일어난 지 열흘 되던 때였다. 그날 체포된 사람은 김한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두 사람이 김상옥 사건 연루 혐의로 경찰에게 붙잡혔다.② 연루자들을 낱낱이 적발하기 위해 경찰이 큰 힘을 들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문으로 병상에 누운 채 재판받아

되돌아보면 김상옥의 효제동 은신처가 발각된 것도 한 연루자의 자백 탓이었다. 경성우편국 소속 우편배달부로 일하는 전우진(全宇鎭)이 고문에 못 이겨 비밀을 토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3·1혁명 시기에 비밀결사 ‘혁신단’ 활동을 함께한 김상옥의 오랜 동지였다. 이번에도 비밀리에 잠입한 김상옥을 변함없이 도와주었다. 보기를 들면 경성역 수화물 취급소에 배달된 김상옥의 화물을 대신 수령했고, 비밀 편지를 여러 관련자에게 전달했으며, ‘불온 문서’ 제작을 거들었고, 회합 장소와 숙식 등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신뢰할 만한 동료임에도 그는 고문에 꺾이고 말았다. 효제동 은신처를 발설한 데 이어 경찰대를 이끌어 현장까지 안내하는 일마저 해야 했다.③

전우진의 배신은 김상옥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이 은밀한 내막은 가족도 알고 있었다. 김상옥의 부인 정진주 여사는 해방 이후 신문 기자 인터뷰에서 그 사실을 밝혔다. ‘동지였던 전모씨의 배신’ 탓에 남편이 죽었노라고.④ 그럼에도 전우진은 김상옥 사건에 연루돼 2년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가 됐다. 1990년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애국장을 서훈받았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다.⑤

체포된 사람들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경찰들은 독이 올랐다. 시국사건이든 일반 형사사건이든 가리지 않고 피의자를 인간 이하로 대하는 것이 그들의 평소 습성이었다. 하물며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된데다 현직 경관들이 살해되고 부상을 입지 않았는가. 취조 경찰들은 분노와 복수심에 휩싸여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심각한 폭행과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28살 미혼 여성 이혜수를 보기로 들 수 있다. 김상옥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그녀는 경찰 취조 중에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당했는지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의 상태는 위중했다. 심지어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난 뒤 열린 재판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이혜수는 병상에 누운 채 재판정에 나와야 했고, 침대에 누워 신음 소리로 가족의 말을 거쳐 겨우 문답에 응할 수 있었다. 그녀는 3·1혁명 때도 비밀결사 애국부인단에 가담한 경력이 있었다. 신문 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혁명 부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⑥


경찰 취조가 끝난 뒤 ‘죄질’이 무겁다는 이유로 검찰에 송치된 이는 도합 19명이었다.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김상옥과 같이 비밀결사 활동을 해온 동료들이었다. 1919년 ‘혁신단’에 함께 소속된 신화수(27), 윤익중(28), 정설교(27), 전우진(41), 이혜수가 그들이다. 이 중 앞자리에 거론한 세 사람은 1920년 김상옥과 함께 암살단 사건에도 연루됐다.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할 때 동행한 안홍한(21)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은 범죄의 형적이 뚜렷하고 증거가 충분하다는 이유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의해 기소됐다. ‘불온’ 인쇄물을 제작한 혐의를 받은 서병두(44)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김상옥 사건 연루자 가운데 가장 중형

1929년 42살 때 경찰서에서 사진 찍은 김한(왼쪽)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필적(1928년 1월1일 김재봉에게 쓴 연하장). ‘마포구 224, 김한’이라고 쓰여 있다. 김윤 제공

다른 한 부류는 김상옥에게 숙식과 활동의 편의를 제공한 사람들이었다. 연락과 통신의 편의를 제공한 여관업자 이수영(37)과 승려 이종욱(40), 지방도시인 함경남도 원산에서 숙소를 제공해준 주광보(19)가 그들이었다. 효제동 은신처를 제공한 이태성(63) 집안의 경우 일가족 6명이 모두 고초를 겪었다. 이 집은 ‘딸 부잣집’이었다. 아내 고성녀(61)와 맏딸 이혜수를 비롯한 네 딸이 모두 경찰 취조를 감당해야 했다. 김상옥의 가족도 핍박을 받았다. 친동생 김춘원(32)과 매제 고봉근(28)이 곤욕을 치렀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경찰서에 갇혀 두 달 동안 끔찍한 취조를 받은 뒤에야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증거 부족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김한은 이채로운 존재였다.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김상옥과 비밀결사 활동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이렇다 할 네트워크도 맺고 있지 않았다. 혈연이나 출신 지역의 공통성 같은 생래적 연줄도 없었다. 뭔가 편의를 제공한 적도 없었다. 김한은 다른 피의자들과 아무런 공통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김상옥과 가장 깊숙하고도 위험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김한의 피의 사실은 가장 엄중했다. 그는 적어도 5회에 걸쳐 대리인을 통해 재상하이 의열단장 김원봉과 비밀 교신을 했고, 그 결과 대규모 음모를 계획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내에 다량의 폭탄을 몰래 반입해 조선 내부를 일거에 동란에 빠트린다는 계획이었다. 김한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김원봉에게서 2천원의 자금까지 수령했다고 한다.⑦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 일간 신문사 기자 월급이 40원이고, 총독부 서기관의 월급이 50원이었다. 또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원 또는 1원10전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억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취조 결과에 따르면 폭탄은 미처 반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한은 의열투쟁을 감행하려 국내에 잠입한 김상옥에게 그것을 넘겨줄 수 없었다. 일본 사법 관료들이 보기에, 범죄행위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죄질이 심각했다. 김한은 김상옥 사건 연루자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1년6개월에서 3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구형받았는데, 김한의 구형량은 징역 5년이었다. 대략 곱절이었다.

김한이 체포되자 그가 몸담은 비밀결사 구성원들은 잔뜩 긴장했다. 비밀결사의 존재가 탄로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김한이 가담한 조직은 3·1혁명 이후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비밀결사였다.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무산자 대중을 위해 일하며, 조선혁명의 대의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혁명가들의 결사였다.

이 비밀결사의 명칭은 ‘조선공산당’이었다. 이름이 같다고 혼동해서는 안 된다. 뒷날 1925년 전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단일한 공산당을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다른 것이었다. 둘을 구분하기 위해 김한이 가담한 1922년의 비밀결사를 ‘중립 조선공산당’이라고 부르는 게 적당하겠다. 줄여서 ‘중립당’이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그 단체를 가리켜 ‘중립공산당’이라거나 ‘중립당’이라는 호칭으로 즐겨 불렀다.

일 꾸미고 작전 짜는 데 탁월

왜 ‘중립’인가? 3·1운동 이후 조선 내부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도도히 흘러들었는데, 이 흐름을 주도한 단체는 해외에 기반을 둔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었다. 그러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는 두 공산당은 조선 국내의 신진 사회주의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서로 다투는 게 옳지 않고 둘 다 정책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김한을 비롯한 국내 신진 사회주의자들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제3의 공산당을 세우려 했다.

이 비밀결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가장 이른 것으로 1921년 메이데이(5월1일)에 설립했다는 정재달의 주장이 있지만,⑧ 자기 단체의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소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1922년 1월 즈음 성립됐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그해 1월19일 ‘무산자동지회’ 명칭의 합법적 사상단체가 등장한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합법 영역의 공개 단체와 비밀결사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직하는 것이 상례였다.

중립당에는 3·1혁명 투사들이 속속 가담했다. 감옥에 갇혔다가 이제 막 출옥한 청년들이 사회주의운동 대열에 들어왔다. 조봉암의 회고에 의하면 1922년 경성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이끈 두 지도자가 있었다. 바로 김한과 김사국이었다. 조봉암은 이들을 가리켜 ‘양웅’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스타일과 개성이 달랐다. 김한은 책사(策士)형이고, 김사국은 투사(鬪士)형이었다.⑨ 김한은 일을 꾸미고 작전을 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에 비해 김사국은 뜻이 굳세고 강직해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끝까지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나아갔다고 한다.⑩

시인 황석우가 남긴 인물평도 비슷했다. 그가 보기에 김한은 일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업을 추진할 때 자신의 모든 정열과 재략을 넘치도록 발휘했다고 한다. 꾀가 많고 신출귀몰하는 재주꾼이었다. 만약 혁명가로서 사명감과 정열이 없었더라면, 김한은 천성으로 미뤄볼 때 전율할 만한 악당의 괴수가 됐을 것이라고 평했다.⑪

두 사람은 중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나란히 선임됐다. 둘이 악수하니 조선의 사상계가 크게 요동쳤다. 두 사람은 신진 사회주의자들을 이끌고 기존 양대 고려공산당을 배격하는 일련의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중 첫 번째는 그해 1~2월에 추진된 김윤식 사회장 반대운동이었다. 구 한국의 개화파 대신이던 김윤식의 장례식을 조선 최초의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치르려 했던 상하이파 공산당과 민족주의 그룹의 의도를 저지했던 것이다. 4월에는 청년운동 내에서 상하이파 공산당의 영향력을 약화했다.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총회 석상에서 서울청년회를 비롯한 5개 회원 단체의 탈퇴를 단행케 한 일이 그것을 의미했다. 6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상하이파 공산당에 소속된 임원 6명을 제명했다. 또 서울청년회 제5회 총회 석상에서 상하이파 출신 임원 5명을 축출했다. 9월에는 노동대회라는 단체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소속의 기존 간부들을 배제하고 노동자적 성격을 강화했다.

노동운동 헤게모니 장악한 중립당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1922년은 노동자가 비로소 직접 노동운동을 개시한 해라거나, 민중에게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해방의 길을 제시한 첫해였다는 경찰 쪽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⑫ 국내 민중운동의 헤게모니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갔다. 김한과 김사국이 공동으로 이끌던 중립당이 해낸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협력이 항구적으로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둘은 그해 말쯤 갈라섰다. 달리 말하면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분열 과정에서 중심인물이 됐다. 김한은 뒷날 ‘화요파’라는 공산그룹의 수장이 됐고, 김사국은 ‘서울파’라고 불리는 비밀결사를 대표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불일치한 지점은 여러 가지였다. 그중 큰 것 하나가 바로 의열투쟁 전술에 대한 태도였다. 김한은 의열투쟁을 가리켜 3·1혁명 이후 가라앉고 있는 대중의 투쟁 의욕을 북돋는 수단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 때문에 해외의 의열단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대규모 폭탄 반입 공작을 지휘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김사국은 의열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것은 광범한 대중을 투쟁으로 발동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며, 대중과 운동단체의 괴리를 심화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각각 제 길을 걸었다. 김상옥 사건은 이처럼 초창기 국내 사회주의운동이 분열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23년 5월17일, 경성지방법원 재판정이었다. 김상옥 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제2회 공판이 열렸다. 피고인 최후진술이 허용되자 김한은 작심한 듯 발언을 토해냈다. 그는 얼굴에 세상을 비웃는 듯한 빛을 띠고 일어서서, 약 1시간 동안 흐르는 물같이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그의 발언 요지는 총독부의 식민지 통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총독 정치가 얼마나 조선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교육과 산업은 물론이요,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조선 사람은 ‘불평’과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에게 남겨진 것은 총독부 법령을 위반하거나, 죽는 길밖에 없다. 김상옥 사건은 다름 아니라 총독 정치가 만든 것이라고 발언했다. 김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혁명을 언급했다. 혁명을 위험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법칙이라고 설명했다. 헤겔과 다윈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한의 진술은 감동적이었다. 신문기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찬 방청석을 비롯해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조리 있는 말을 숙연히 경청했다.

그러나 김한은 재판부에 보복을 당했다. 그로부터 10일 뒤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 미쓰야(三矢) 판사는 그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순간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검사 구형보다 2년이나 더 무거운 형량이었기 때문이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방청객들은 법정을 나서면서 울분을 토했다. 불평을 부르짖고 판사를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의 외조부

김한의 최후진술은 피억압자에게는 감동을 주고, 억압자에게는 보복의 칼날을 갈게 했다. 진실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의 진술은 당대인에게만 영향을 주는 데 머물지 않았다. 60년이 지난 뒤,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다 투옥된 그의 외손자 우원식(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그 진술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자긍심과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⑬

김한의 진술에서 주목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끝내 비밀결사 중립공산당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외 망명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폭탄 반입을 모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의 판단과 책임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시종일관 이렇게 진술했다. 그리하여 김한은 일본 관헌들의 야수적인 취조 속에서도 비밀결사의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진술 전략은 주효했다. 중립당은 삼엄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노출되지 않았다. 체포된 혁명가는 어떻게 진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 문헌

① ‘무산자회 간부의 검거’, <조선일보> 1923년 1월30일치

② ‘李遂榮씨도 검거’, <조선일보> 1923년 1월30일치

③ 宋相燾, <騎驢隨筆>(한국사료총서 제2집), 국사편찬위원회, 320쪽, 1955

④ ‘열사의 후예들 6: 김상옥 의사의 미망인 鄭여사’, <동아일보> 1959년 11월28일치

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a.go.kr

⑥ ‘병상에 누운 대로 이혜수양 공판’, <동아일보> 1923년 12월26일치

⑦ ‘폭탄과 권총의 대음모 김상옥 사건의 공판’, <동아일보> 1923년 5월13일치

⑧ История и деятельность нейтральной коркомпартии: Доклад делегата Тену(중립공산당의 역사와 활동, 대표자 전우의 보고), с.7,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64, л.51-57

⑨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죽산 조봉암 전집> 1, 344∼345쪽, 1999

⑩ 金思國氏 永眠, <동아일보> 1926년 5월10일

⑪ 황석우, ‘나의 8인관’, <삼천리> 4-4, 29쪽, 1932년 4월

⑫ <고등경찰보> 4, 281쪽, 283쪽

⑬ 우원식, <어머니의 강>, 아침이슬, 253쪽, 2011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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