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경림은 유신의 암흑이 절정이던 1978년 적었다. “목 잘린 교우들의 이름 들을 적마다/ 사기가마 굳은 벽에 머리 박고 울었을/ 황사영을 생각하면 나는 두려워진다/ 나라란 무엇인가 나라란 무엇인가고”(‘다시 남한강 상류에 와서’ 부분)
철학자 김상봉(59·전남대 철학과 교수)은 신경림의 시를 언급하면서 2017년 적었다. “국가는 기성품으로 만들어져 주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3인칭의 대상이 아니라 1인칭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저것도 국가가 아니고, 바로 네가 국가다. 네 속에 나라가 있다. 그러니 부디 이제 국가가 무엇이냐고 묻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물어라!”
(길 펴냄)의 머리말인바, 김상봉은 이 책에서 “새로운 나라를 형성할 마음”이 무엇인지 말한다. 형성보다 파괴·저항의 역사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 한국인이 어떤 길을 거쳐서 박근혜 탄핵이라는 놀라운 성취에 이르렀는지” 돌아본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길을 우리가 걷게 될 것이며 또 걸어야 할 것인지를” 전망한다. 무엇보다 그는 “새롭게 정치적으로 각성된 젊은 세대를 위해 그들이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나라를 위한 최소한의 표준과 척도를 제시하려 했다”고 말한다. 책의 부제가 ‘세월호 세대를 위한 정치철학’인 이유다.
3부로 나뉜 책은 대담 형식으로 쓰였다. 논리적이고 간명한 문장은 앞선 책들처럼 여전하다. 가상 대담이되 실제 대화와 질문을 바탕으로 했으며, 20·30대는 물론 40대 이상도 대화 상대로 설정했다. 1부(‘걸어온 길을 돌아보다’)에서는 한국 사회가 독재국가에서 기업국가로 이행한 역사, 그 기간 실종된 경제의 공공성을 짚는다. 특히 지난해 4월 총선을 박정희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1979년 10월 부마항쟁에 견줘 ‘제2의 부마항쟁’으로 일컫는다.
2부(‘나아갈 길을 내다보다’)는 힘의 나라인가, 아니면 뜻의 나라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또 하나의 적폐로 왜 ‘기성세대’를 지목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제1151호 표지이야기 ‘정치인·기성세대도 적폐다’ 참조). 3부(‘네가 나라다’)에서는 한국 경제 위기의 본질과 재벌 해체의 당위를 말하고 노동자의 경영 참여가 왜 절실한지 설득한다. 끝으로 동학, 3·1운동, 함석헌, 5·18, 세월호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에서 ‘새로운 철학’을 요청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백성’과 ‘시민’이다. 백성이 수동적이고 명령만 기다리는 존재라면, 시민은 주체적이고 형성하는 존재다. 자신을 주체로 자각하는 시민들만이 오직 자신 있게 ‘새로운 나라’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형성의 동력은 오직 현실에서의 고통과 슬픔이다. 고통의 비명에 깨어난 정신이 참된 ‘앓음’에서 ‘앎’으로 나아갈 때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집요한 애도와 응답은 한국 역사를 이끌어온 근원적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상봉은 이 책이 “흐르는 물 위에 씨를 뿌리는 어리석은 수고”라고 했다. 그럴 리 있겠는가. 홀로주체 아닌 서로주체, 노예 아닌 주인, 파괴 아닌 형성, 우울 아닌 슬픔의 힘을 믿는 시민들의 땅에 그의 ‘씨’가 닿아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전진식 교열팀 기자 seek16@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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