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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놀이로 은유한 그림책 <연애놀이>
등록 2017-02-22 22:13 수정 2020-05-03 04:28

연애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르로 그림책을 꼽고 싶다. 글은 없거나 적을수록 좋다. 연애에 대해 자신할 수 있는 사실이란 표현 불가능성이 전부일 것이다. 연애의 표현은 필패에 가깝다. 특히 언어로 할 때.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 듯” 사랑은 오고. 사랑이 갈 때는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모든 인용은 채호기 시 ‘사랑은’ 일부)

정유미(36) 작가의 (컬쳐플랫폼 펴냄)는 연애를 놀이로 은유한 그림책이다. 그는 2014년 , 2015년 로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상을 2년 연달아 받았다. 는 정유미 작가의 애니메이션 (Love Games, 2013)의 그림책 버전. 이 작품은 2014년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로 꼽히는 ‘자그레브 페스티벌’에서 최고상인 그랑프리를 받았다.

한 커플이 ‘연애놀이’로 소꿉놀이, 종이접기, 뒷목 누른 손가락 알아맞히기, 병원놀이, 시체놀이를 한다. 기쁨과 슬픔, 키스와 기스의 날들. 시작이 중요해 보인다. ‘그녀’는 바닥에서 심장처럼 생긴 돌 하나를 집어 손바닥에 올린다. 옆에 있는 ‘그’는 쳐다보고만 있고. 그녀는 천천히 손을 오므려 돌을 쥔다. 일반적으로 심장 크기는 느슨하게 쥔 주먹만 하다. 그녀는 돌로 바닥에 사각형을 그린 다음 먼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현실과 구분된 둘만의 우주로, 그가 그녀를 따라 들어온다.

생-로-병-사라는 흐름이 연상되는 저 놀이들 역시 그녀가 준비하고 주도한다. 참여하는 입장인 그는 (많은 남성이 답답함과 억울함을 호소하듯) 하자는 대로 했는데 이상하게 그녀를 매번 실망시킨다. ‘병원놀이’ 편. 그녀가 운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살피기보다 청진기 먼저 갖다대고 주사를 놔보고 붕대도 친친 감아보는 그. 뭐지. 더 서럽게 우는 그녀. 나중에야 손수건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손을 뿌리친 뒤다. 해결책을 찾느라 그녀의 눈물은 못 보는 그와, 눈물에 공감부터 하길 바라는 그녀.

연필 드로잉으로 컬러는 흑과 백 둘뿐이다. 선이 워낙 섬세하고 간명하다. 흑백사진처럼 형태의 본질에 충실한 장면들은 ‘말이 없다’. 원작에선 신발 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 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 같은 앰비언스(특정 공간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음향)만 들린다. 에도 상황을 설명하는 간략한 문장이 있지만 대사는 없다. 원작에 앰비언스 아닌 소리가 딱 한 번 사용된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1685~1757)의 소나타 Kk208. 소나타는 초창기나 현재나 형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악곡이다.(에런 코플런드) 스카를라티는 그런 소나타에 재능을 집중시켜 555곡이나 남겼다. 그가 건반 소나타에 매달린 건 그 음악에게 수백 번이고 ‘기꺼이’ 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애는 이기고 지는 게 아무 의미 없는 세계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일엔 자꾸 지게 된다. 져야 또 하기 때문인지 어쩐지. ‘졌다’가 계속 ‘좋다’로 들린다.

석진희 디지털뉴스팀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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