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알아. 엄마가 총알이 와도 왜 바닥에 안 엎드리는지. 엄마와 내가 같이 죽어야 하니까 그런 거지?” 라이사의 4살 딸 옐로치카가 엄마 등에 업혀서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여성 이야기를 엮은 책 에 실린 라이사의 증언이다.
“우리는 그동안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고 말하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영웅, 승리, 패배, 장군 같은 단어를 쓰지 않고도 일상을 산산조각 낸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의 한 챕터는 여성만큼 침묵을 강요받은 아이들의 목소리로 채워졌는데,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글항아리 펴냄, 2016)이 그 확장판이다. 전쟁의 공포와 슬픔에 압도당해 성장을 멈춘 이들의 목소리가 가감 없이 실렸다.
빌랴 브린스카야, 12살. 아이는 자주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었다. 전쟁 전에는 6학년 소년 비차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하늘색 눈동자, 작은 키, 를 쓴 쥘 베른을 좋아한다는 점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창밖에서 괴상한 소음이 일던 날, 군인이던 아빠가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아빠는 전장으로 떠나고 엄마, 두 동생과 피란 열차를 탔다. 폭격의 위험 속에 나아가는 열차에서 엄마는 아이들을 꼭 안고 웅얼거렸다. “죽어야 한다면, 다 함께 죽는 거야. 아니면 나만….”
4년이라는 전쟁의 시간은 끔찍했지만, 특히 빌랴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이 있다. 사람으로 빼곡한 열차에서 바로 옆에 서 있던 여성이 빌랴의 머리 위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속옷까지 끈적한 피가 배었다. 빌랴는 이때부터 더 이상 슬퍼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는 아이가 됐다.
빌랴는 동생을 잃을 뻔한 기억 때문에 아직도 몸서리친다. 열차가 잠깐 멈춘 사이 동생 토마가 홀린 듯 들에 핀 수레국화를 꺾으러 나갔다. 꽃을 한 아름 안고서야 기차가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토마는 검은 눈동자를 크게 뜬 채 ‘엄마!’ 소리도 못 내고 정신없이 뛰었다. 한 군인이 창밖으로 나가 아이를 객차 안으로 힘껏 던졌다. 다음날 아침, 길게 늘어뜨린 토마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셌다.
이런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불에 그을려 장밋빛이 된 아이들의 주검으로 가득 찬 거리가 여전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카차 코츠타예바, 당시 13살. “눈을 감아라 아들아, 보지 마라” 아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도는 볼라자 파랍코비치, 당시 12살. 굶주림에 미쳐 아침 식사로 벽지를 뜯어먹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갈리나 파르소바, 당시 10살….
한 사람의 취재만으로도 이 정도일진대, 파괴된 개인의 역사는 책 밖에도 파편처럼 널려 있을 것이다. 이들의 목소리에 나의 어릴 적, 내 부모의 젊은 시절, 나의 연인, 내 아이의 지금을 자꾸 대입해보면, 책 읽기는 속도를 내기 힘들다.
그럼에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작가는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 책”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고통에 귀 기울여 세상이 “죽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와 두려움”을 가질 때까지 이들의 이야기는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져야 한다. 여전히 전쟁의 총성에 아이들 울음소리가 묻히는 세상의 저 끝까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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