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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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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삽날처럼 꽂히는 시

‘희망을 기획하는 시인’ 송경동의 세 번째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등록 2016-02-26 13:06 수정 2020-05-03 04:28

정의가 구조조정에 내몰리는 시대. 평등이 외주화로 떠밀리는 시대. 행복이 일반해고로 쫓겨나는 시대. 진실이 비듬처럼 우수수 흩어지는 시대. 생존이 6개월, 1년 단위로 재계약되는 시대. 100년 만에 포착한 중력파 신호가 가짜일 확률이 20만3천 년에 하나꼴인 시대. 그러나 골든타임 내팽개친 대통령의 공약이 거짓일 확률은 99.9%인 시대.

시인은 관념이 아니라 물질의 편에 서 있다. ‘빠루 용접봉 망치 곰빵 질통 안전모 함마 줄자 드릴…’. 그의 언어는 탈근대 탈영토 탈식민지 탈구조화 따위가 아니라 탈곡기를 상상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 때문에 시인은 빈자리 하나 쉬 차지하지 못한다. “저기는 분신한 자리/ 저기는 손목을 그은 자리/ 저기는 얼마 전까지 굶은 자리/ 저기는 두번이나 고공에 오른 자리/ 저기는 다시 끌려갔다 온 자리”(’빈자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죄수 되기를 꺼리지 않는다. “종로경찰서 영등포경찰서 서초경찰서 남대문경찰서 서울중앙지법/ 골고루 다양한 곳에서 여섯 통의 소환장이/ 한날한시에 와 있다”(‘여섯 통의 소환장’)고 태연히 말한다. 천상병문학상을 받는 날에도 법정에 섰고, 벌금 삼백만원을 받았지만 상금이 오백만원이니 “정의가 일부 승소했다”(‘시인과 죄수’)고 담담히 적는다.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 어떤 위대한 시보다/ 더 넓고 큰 죄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앞의 시) 다짐도 한다. 시인은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공구리 벽’을 월담하는 사람이다.

정의 평등 행복 진실이 각혈하는 시대, 아침마다 안개에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묻어나는 시대. 시인이 시대의 목탁이 될 때 시인은 언론인인 것이요, 시가 시대의 증언이 될 때 시는 곧 언론이라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자가 아닌 시인은 2011년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의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받았다.

시인은 송경동(49)이다. (창비)는 (삶이보이는창·2006), (창비·2009) 이후 7년 만에 나온 신작 시집이다. 56편을 5부로 나눠 실었다. 아픔 고통 투쟁 연대의 세상을 주먹에 오래 쥐고 쓴 시들이다.

시집은 묻는다. “희한한 세상, 모두 기를 쓰고/ 법 내로 들어가겠다는데/ 국가가 나서서 모두를 법외에서 살라 한다 (…) 모두를 법외로 밀고 그 법 안에서/ 오늘 안전한 자는, 오늘 행복한 자는/ 오늘 웃는 자는 누구일까”(‘법외 인간들을 찬양함’) ‘노동열사’들의 추모시를 여러 편 담은 것은 법외로 밀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집에서 가장 긴 시(14연 170행)이자 표제작인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에서 시인은 절정으로 토한다. “나는 송경동이다/ 아니 나는 송경동이 아니다 (…) 수없이 많은 이름이며/ 수없이 많은 무지이며 아픔이며 고통이며 절망이며/ 치욕이며 구경이며 기다림이며 월담이며/ 다시 쓰러짐이며 다시 일어섬이며/ 국경을 넘어선 폭동이며 연대이며/ 투쟁이며 항쟁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에도 배우지 말아야 할 말이 ‘절망’이라고 시인은 적었다. 그는 ‘희망을 기획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악독하고 비참한 일들도 많은 세상이지만 그보다 더 존엄하고 아름다운 일들로 가득 찬 게 이 생명의 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시집 '시인의 말') 이제 알겠다, 시인이 아직 서정을 버리지 못한 사정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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