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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렷하다, ‘덕통’에 설렌 그날

훌륭한 연주 실력에 목소리마저(!) 좋은 피아니스트 김선욱… 어려워 말고 그저 듣다보면 당신에게도 덕통이 찾아올지도
등록 2015-08-25 20:15 수정 2020-05-03 04:28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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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기억할까? 적어도 나에겐 김선욱의 피아노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2013년 겨울, 지금이라면 오히려 관객석 사이드에 앉겠지만(합창석 중앙은 타악기 뒤쪽이라 협연자의 소리가 묻힌다) 합창석이 처음인지라 중앙 맨 첫 줄에 앉았던 그때. 어차피 듣고 싶었던 건 다음 곡인 교향곡 5번이었기에 피아노 협주곡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1악장 중반부터 내 시선은 오직 피아노에 가서 멈췄고, 곡이 끝날 무렵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의 두근거림과 떨림이 너무 강렬해서, 인터미션 때 빠져나와 꺼놨던 휴대전화를 켜고 다급히 이렇게 썼다. “이렇게 사랑에 빠지나봅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절대로 덕통(덕후 교통사고·덕후가 덕질 대상에 깊이 빠지는 순간을 사고에 빗대 표현한 말) 당하지 않는 캐릭터 요소가 바로 ‘친구 최애캐’(친구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인물)라던데. 김선욱의 오랜 팬이던 친구가 공연에 간다고 했을 때 그저 가격이 비싸다고만 넘겼던 나는 어디로 갔는가. 공연을 본 바로 다음달, 그해 있을 베토벤 소나타 전곡 패키지 관람권을 질러버렸다. 같은 공연도 굳이 이틀을 모두 찾아가서 들었다. 어제의 하늘은 오늘과 같은 하늘일 수 없으므로! 너무 많은 예매에 티켓 양도를 생각하다가도 직접 자리에 앉아 첫 마디 연주를 듣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 마는 것이다. 역시 영업은 교주님이 직접 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당시엔 몰랐지만 김선욱은 한국에서 꽤나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라며 친구가 들어보라고 꼬드겼지만 그때는 듣지 않았다). 2006년 18살의 나이로 세계적 권위의 리즈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 그리고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하며 세계 무대에 데뷔했다. 현재는 국내외에서 실내악, 협주곡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유명 오케스트라와 함께 활발히 연주를 하고 있다. 훈훈한 얼굴에 늘 진지한 태도에다 꾸준히 피아노도 다채로워지는데다 심지어 그는 목소리까지 좋다! 맙소사.

첫 연주회 이후, 평생 들을 일 없을 줄 알았던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들어보기도 하고 김선욱이 존경하고 좋아한다던 ‘라두 루푸’와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를 듣기 위해 유튜브도 뒤져봤다. NML이라는 클래식 앱도 열심히 사용했다. 도대체 왜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 감정을 때론 학문으로, 때론 예술로 설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덕통은 너무 순식간이고 나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건 아직 요원한 일이다. 다만 김선욱과 관련된 음악을 찾아 듣고, 음악회를 찾아가는 모든 과정들은 그 답을 찾아가기 위한 나만의 작은 퍼즐조각 모으기 같은 거였다. 피아노에 집중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 한층 더 깊어지고 울림 있는 그의 연주에 전율할 때마다 마음속은 뿌듯함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의 조각을 모았다고 생각하면서.

분명히 말하지만 클래식은 어려운 음악이 맞다. 나 역시 번번이 실패했고, 번번이 외면했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등장했던 것은 ‘시민’의 등장, 그리고 대중의 요구에 발맞춘 시대적 변화였다. 어느 철학자는 모든 예술이 독자의 해석에 열려 있다고 했다. 예술은 늘 다의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1차적 감상에선 내가 느끼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은하계, 우주이므로. 해석에 연연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클래식을 들어보자. 그러다보면 언젠가 나만의 김선욱이 생긴다. 그게 작곡가건 연주자건 지휘자, 혹은 오케스트라건 상관없이. 장르를 뛰어넘는 ‘덕통 사고’란 그런 거다. 그러니 우리는 겸허하게 기다릴 뿐이다. 또 다른 덕통이 와서 나를 치고, 덕분에 일상이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그 행복의 시기가 어서 찾아오기를.

김선욱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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