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3일 만난 작가는 ‘복면가왕’ 같았다. 작가 연락처를 묻자 출판사 대표는 “작가님과 관련된 외부 연락은 작가의 요청에 의해 모두 출판사를 통하고 있다”고 했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할 때도 “잘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만나기 4분 전까지 대표와 통화했지만, 이날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은 대표 한 명뿐이었다. “작가님은 어디 가셨나요?”란 질문에 대표는 멋쩍게 답했다. “아, 제가 그 작가입니다.” ‘왜 그랬느냐’ 물으니 “내 출판사에서 내 책을 낸다는 게 모양이 좀 우스운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140자에 담은 한 편의 소설들만남도 특이했지만 ‘이야기의 씨앗’ 송한별(26)씨가 책을 낸 과정은 더 특이하다. 그는 지난해 9월27일부터 트위터에 ‘이야기의 씨앗’이라는 필명으로 140자 이내의 소설 270여 편을 올렸다. 12월21일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텀블벅’을 통해 소설의 출판 기금 모집을 시작했다. 40일간 375명으로부터 425만원을 후원받았다. 애초 목표액이었던 70만원을 훨씬 웃도는 금액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10만원을 후원한 독자도 3명이다. 이렇게 쓴 소설은 올해 3월2일 (에픽로그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여기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버튼이 있어. 당신이 영혼을 판다면 이 버튼을 주지.” 악마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선택을 했을 것 같지 않아.” “더 나쁜 선택을 할 수는 있었겠지.” 악마는 씩 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더 나은 미래’)그의 ‘140자 소설’은 140자 안에 반전을 담은 재기 넘치는 작품들이다.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원래 의도가 어긋나는 상황들”이 주요 소재다. 과학소설(SF)에서 다룰 법한 소재도 많다. 그래서 그런지 “제 ‘트위트 소설’을 좋아한 사람들 중에는 게임과 만화,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젊은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환상문학 웹진 에서 2012년부터 SF 작가를 인터뷰하고, 대담이나 합평회에 대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송한별씨에게 트위터는 글을 쓰는 ‘종이’이자 ‘평가’의 장이었다. 글을 올리면 리트위트 수, 답글 등으로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그의 트위트를 본 독자가 덧붙여 글을 쓰거나 대사가 있을 경우 캐릭터를 그려 2차 창작을 하기도 한다.
작가는 손을 벌리고 독자는 호주머니를 연다. 이전에는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던 두 당사자가 직접 만난다. 콘텐츠를 두고 양자의 직거래가 이뤄지는 것이 ‘크라우드펀딩’이다. 작가 경력이 없어도 거래는 성립된다. 영화·웹툰·게임 등이 펀딩의 주를 이루지만 간간이 문학작품에 대한 펀딩도 눈에 띈다.
독자에게 집세를 후원받는 작가도 있다. 시집을 팔아 월세를 마련한다는 ‘시월세집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김경현(30)씨다. 지난 2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프로젝트의 네 번째 시집 를 출간했다. 51명이 170만원을 후원했다. 이번 시집 덕택에 몇 달간 월세 30만원을 잘 냈다. 모두 108편의 시가 실린 에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그의 시각이 드러난다.
밤도깨비처럼 새벽을 헤매다 일어나보니/ 변기가 꽉 막혀 있다. 도무지 내려갈 생각이 없는 걸 보고 있으니 꽉 막힌 변기도// 서럽고 꽉 막힌 세상도 서럽다. 곰팡이처럼 피어오르는 내 감정도 서럽고 벽에서 꽃피는 곰팡이도 서럽다. 무엇보다 놈팽이로 살았던 내 몇몇의 하루가 서럽다.// 잘 뚫리지도 않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꽉 막힌 변기 같고, 벽에 핀 곰팡이 같은 나. 그리고 날들. (‘무엇보다’)살고 있는 가건물에서 발견한 곰팡이에서 시작된 이 시처럼 김씨의 시는 젊은이들의 고민과 생활을 솔직히 드러낸다. 길 가다 마주친 할머니, 책, 영화, 술 마시고 돌아오는 길 등이 모두 그의 글 소재가 된다.
홍보도 ‘셀프’다. 서울 이태원 계단장, 세종예술시장 소소, 상상마당 어바웃북스에 직접 나가 시집을 판다. 밧줄을 던져 독자를 끌어당기는 마임을 하거나, 농담을 툭툭 던지며 지나가는 사람의 주목을 끈다. “작가라고 폼 잡고 있는 게 내 스타일은 아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주요 직업’은 따로 있다. 아는 형이 운영하는 술집을 낮에 빌려 서점으로 꾸몄다. 오전 10시부터 술집을 여는 오후 5시까지 ‘다시서점’을 운영한다. 서점의 운영도 소셜미디어 계정을 활발히 이용한다. 사진 공유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 ‘다시서점’ 계정에, 서점에 오는 사람들의 사진을 인상평과 함께 올린다. ‘다시서점’의 팔로어 수는 2500여 명. 대개는 새로 입고된 시집의 표지와 글귀를 올리지만 본인 책의 표지나 글귀를 올리기도 한다.
장편소설로 크라우드펀딩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정현석(20)·리한빛(20)씨는 111명으로부터 400만원을 후원받아 7월 초 (beyourself 펴냄)을 출간했다. 2년 전 이외수 작가의 ‘문학연수생’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두 사람은 같은 제목을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정현석씨는 페이스북 페이지 ‘시소타기’ 대표이기도 하다. 청년작가 15명과 함께 페이스북을 통해 시를 발표하고 있다. 이 페이지의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5582명이다. 잠재 독자가 5천 명 이상이라는 의미다. 이곳에서 크라우드펀딩 소식을 보고 지원한 사람도 20여 명이다. 개인 계정으로는 본인이 활동하고 있는 청년문화모임 ‘작은따옴표’ 소식도 전한다. 페이스북을 통해 그가 크라우드펀딩을 한다고 알리자, 페이스북 친구들은 “예술로 밥 먹고 사는 기적을 보여달라”며 응원글을 남겼다.
청년작가는 ‘글쓰기’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가 녹록지 않다. 김경현씨는 서점을 운영하지만 벌이가 적어 홍보 관련 일이나 글쓰기를 외주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 ‘투잡’ 이상을 뛰지만 건강보험료가 밀린 적도 많다. ‘이야기의 씨앗’ 송한별씨는 전자책을 만드는 출판 관련 콘텐츠 회사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인턴으로 일한다. 주로 글을 쓰는 시간은 출퇴근 때다. 자신의 출판사 책을 편집하는 등의 일은 모두 퇴근 뒤에 한다.
크라우드펀딩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청년작가들은 등단하지 못(안)한 비주류다. 책은 냈지만 ‘작가’라는 사회적 레터르는 없다. 이들은 한국 문단의 등단 시스템에 비판적이지만, 필요하다면 그 시스템에 기꺼이 편승하겠다는 경우도 있다. 송씨는 등단을 “따놓으면 좋은, 하나의 자격증”이라고 했다. 정씨는 “오디션”이라고 했다. 김씨에겐 “자기검열”이다. 그는 매년 투고를 해서 자신의 문학적 성장을 검증받으려 한다.
다양한 만남이 다양한 문학 불러올까신경숙 표절 사태로 불거져나온 ‘문단권력 시스템’의 대안으로 ‘바깥’이 꼽히기도 한다. 지난 7월15일 문화연대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이동연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은 장르 전문지 , 웹진 , 문예지 등을 언급하며, 새로운 문학장(場)의 출현과 대안적 문학 생산 주체의 생성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기존 문학 출판 시스템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독자들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새로운 문학 주체’로 등장했다.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에 ‘물질적’ 지원을 하며 ‘책으로 내도 돼’라는 응원과 함께 ‘문학 자격증’을 발급하는 셈이다. 그들이 격려를 보내는 글들은 기존 문단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신춘문예용 글’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비주류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장르와 시도들은 한국 문학의 갱신을 불러올까. 독자와 작가의 다양한 만남이 다양한 문학을 생성하는 도화선이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홍연 교육연수생 afternuuun@naver.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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