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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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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고 싶은 지구가 365바퀴를 돌고

오독이어도 모독이진 않길 기대하며 읽은 문태준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록 2015-04-25 16:23 수정 2020-05-03 04:28

틀림없이 오독일 것입니다.
화사한 4월에 태어난 서정시집(문태준 ·창비 펴냄)으로 난폭한 4월의 서정을 읽으려 하니 모독일 수도 있겠습니다. 시의 4월이 현실의 4월과 같을지 확신할 순 없습니다. 오독이어도 모독이진 않길 바랍니다. 음풍하거나 농월하지 않고 삶의 질박을 주시해온 시인의 서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한겨레 김경호 기자

새털처럼 흩어지는 ‘떠난 이의 형상’

“가난한 가족을 맴돌며 핥”던 “겨울바람”(내 귓가에)이 그쳤습니다. 봄이 왔으나 따뜻하지만은 않습니다. “찬 마룻바닥에 덩그러니 앉으니 따라와 바깥에 서 있”는(이 시간에 이 햇살은) 봄볕이 서늘합니다. “서럽고 섭섭하고 기다라니 홀쪽한 햇살”(이 시간에 이 햇살은) 아래서 한기에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픈 혼의 흙냄새”(소낙비)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릅니다. 4월의 ‘그날’이 1년을 돌아 다시 왔습니다. 304명의 세월호 가족은 365일 동안 날마다 4월을 살았습니다. 조지 엘리엇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 불렀던 ‘그 4월’의 원형질은 아마 ‘그들의 4월’ 안에 있을 것입니다.

“꽃잎이 지는 열흘 동안을 묶었다/ 꼭대기에 앉았다 가는 새의 우는 시간을 묶었다/ 쪽창으로 들어와 따사로운 빛의 남쪽을 묶었다/ (…)나의 어지러운 꿈결은 누가 묶나….”(묶음)

묶어세우고 싶은 지구가 365바퀴 돌았습니다. ‘떠난 이의 형상’은 새털처럼 흩어지는데 꿈결에서도 붙들지 못합니다. “눈두덩과 눈, 콧부리와 볼, 입술과 인중, 목과 턱선의 경계가 사라”지는 마애불(여시)처럼 흐릿해져만 갑니다. 맹골수도로 배를 타고 나가도 “가늠할 수 없는 네 가슴속 해저”(먼 바다를 바라면)엔 닿지 못합니다.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 내게 웅얼웅얼 무어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 나는 한 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 눈뭉치여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조춘)

이별을 마무리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이 붓고 뼈가 탑니다. 이별에도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별당한 이들의 뜻도 묻지 않고 이별의 종지부를 강요합니다. 새에게도 물어야 하는 것이 이별에 대한 예의입니다.

“나는 스케치북에 새를 그리고 있네/ 나는 긴 나뭇가지를 그려넣어 새를 앉히고 싶네/ (…) 그러나 새는 훨씬 활동적이어서 높은 하늘을 더 사랑할지 모르지/ 새의 의중을 물어보기로 했네/ …새에게 미리 묻지 않는다면/ 새는 완성된 그림을 바꿔달라고/ 스케치북 속에서 첫울음을 울기 시작하겠지.”(누구에게라도 미리 묻지 않는다면)

어느 날 갑자기 집이 허물어졌습니다. 집이 허물어진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근육질 짐승들이 이빨을 세웁니다.

“들까마귀떼처럼 와서/ 들까마귀들이 와서/ 비척비척하는 나의 집을/ 먼 들녘 곡식 낟알만도 못한 나의 집을/ 내게는 두개골과도 같은 옛집을/ 흩어놓고 풀어놓고 무너뜨리려 하네/ 귀신들/ 귀신들이 말을 트네.”(옛집에서)

우리는 눈물 많은 세계의 일원

문태준의 6번째 시집입니다. 3년 동안 쓴 61편의 시를 담았습니다. 시인은 “간소한 언어의 옷을 입혀보려는 마음”으로 시를 썼다고 했습니다. “둘러대지 말고 짧고 선명하게 세계에 솔직한 말을 걸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아픈 언어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언어가 무력한 세계에서 가시 같은 시어가 목구멍에 걸립니다. 그의 시 ‘일원’을 흉내 내봅니다.

가라앉은 세월과 가라앉힌 국가와 꽃비 날리는 봄과 캡사이신 날리는 거리와 닿을 수 없는 푸른 심해와 닿을 수 없는 푸른 지붕과 거리로 간 부모들과 남미로 간 대통령과, 더불어 우리는 눈물 많은 세계의 일원.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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