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으면 나 같은 사람은 번역가가 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기억력이 나빠서 영어 단어를 통 암기하지 못하니 말이다. 책 한 권 번역하면서도 이미 사전에서 찾은 단어를 찾고 또 찾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한글맞춤법도 그때그때 새로 찾아봐야 한다(이를테면 ‘생각건대’냐 ‘생각컨대’냐는 볼 때마다 헷갈린다). 그래서 번역을 의뢰받으면 일단 전자 원고를 구한다. 출판사에 요청해 PDF파일을 받거나, 아마존에서 킨들 전자책을 구입해 변환하거나,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책을 재단해 스캔한다. 이렇게 하면 영어 단어를 찾을 때 더블클릭해 붙여넣기만 하면 된다.
인터넷, 특히 구글이 등장하기 전의 선배 번역가들은 르네
상스적 지식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원서와 영어사전만 가지고 번역을 해내려면, 배경지식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수많은 정보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검색어를 입력하면 효과적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 경우는 인터넷과 책에서 자료를 찾는 시간이 번역 작업의 절반은 되는 듯하다.
흔히들 영어 공부 하면 단어 공부를 생각하지만, 나는 투입 시간 대비 효과가 가장 작은 것이 단어 공부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어휘력을 갖추지 않으면 문장을 읽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22,000’이니 ‘33,000’이니 하는 제목이 붙은 책에 실린 단어 중에서 여러분이 평생 한 번이라도 접하는 단어는 과연 몇 개나 될까? 경험상, 영한사전에 1번 뜻만 나와 있는 단어(대체로 철자가 길고 복잡하다)는 암기해두는 것보다 그때그때 사전에서 찾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하지만 미리 익혀두어야 하는 단어 유형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관용 표현이다. 지금 읽고 있는 구절이 관용 표현인지 아닌지 모르면 사전을 찾아야 할지 말지 판단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하는 책에서 ‘a huntin’ shootin’ fishin’ gasbag’이라는 표현이 나오기에 ‘사냥하고 총 쏘고 낚시하는 허풍쟁이’라고 번역하려다 혹시나 하고 저자한테 물었더니 ‘huntin’ shootin’ fishin’’은 ‘very much a ‘type’ of person’(전형적인 인물)을 뜻하는 관용 표현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순 허풍쟁이’로 번역했다.
둘째는 가짜 친구다. 영어와 한국어에서 형태가 같지만 뜻은 다른 단어인데, 우연히 형태가 같은 경우도 있고 뜻이 달라진 경우도 있다. 이희재의 (교양인, 2009)에서는 ‘columnist’와 ‘칼럼니스트’를 예로 든다. 우리말 ‘칼럼니스트’는 시사 문제를 주로 다루지만- 하긴 요즘은 연애 칼럼니스트도 있더라만- 영어 ‘columnist’는 ‘연예부 기자’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겉보기에 같다고 해서 그대로 번역하면 오역하기 십상이다.
노승영 생계형 번역가*이번호부터 칼럼 제목이 ‘206호에서 생긴 일’로 바뀝니다. 집에서 작업하다 아파트 상가 206호에 작업장을 작게 하나 마련했다고 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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