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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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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와 인터넷만 있다면

소박한 번역가의 장비
등록 2015-01-17 15:56 수정 2020-05-03 04:27
노승영

노승영

“좋은 목수가 연장 탓을 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좋은 연장을 쓰기 때문이다.”(작자 미상)

제1030호 칼럼에서 예고한 대로 이번에는 장비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번역은 원서와 영한사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각종 도구를 활용하면 효율성을 부쩍 끌어올릴 수 있다. 우선 디스플레이. 나는 18인치 모니터를 쓰는데, 원서의 PDF파일과 번역 원고, 웹브라우저를 동시에 띄우기에는 화면 공간이 부족하다. 동료 번역가 중에는 27인치 모니터를 쓰는 사람도 있다. 이 정도면 A4 문서도 원래 크기대로 볼 수 있다. 적어도 노트북 받침대를 쓰거나 외부 모니터를 연결하지 않으면 거북목증후군에 걸릴지도 모른다.

경험상 키보드에 가장 관심이 많은 직종은 프로그래머인데 번역가도 만만치 않은 듯하다. 일하는 시간 내내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오타가 적고 손이 피로하지 않은 키보드를 찾는다. 번들 키보드는 멤브레인 아니면 펜타그래프 방식이지만, 키감을 따지는 이들 중에는 구닥다리 기계식 키보드를 찾는 사람이 많다. 체리사에서 제작한 스위치를 이용한 키보드로, 짤깍짤깍 소리가 나거나 딸깍하고 걸리는 느낌이 나는데 이 덕에 키가 눌리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궁극의 키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정전용량 무접점 방식의 키보드를 쓴다. 가격이 비싸지만 한번 중독되면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번역가치고 오른쪽 손목이 성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마우스를 쓰느라 손목이 비틀어져서 반복사용긴장성손상증후군, 일명 손목터널증후군에 걸린 탓이다. 그래서 어떤 번역가는 손가락으로 볼을 굴리는 트랙볼을 쓰기도 하고, 세워 잡는 버티컬 마우스를 쓰기도 한다.

번역회사에서 일감을 받아 기술번역을 하는 사람은 CAT, 즉 컴퓨터보조번역 도구에 익숙할 것이다. 나는 SDLX라는 프로그램을 쓰는데, 원서와 번역 원고를 문장 단위로 비교하면서 작업할 수 있고 과거에 번역한 문장을 참고할 수 있어서 유용하다(사진). ‘구글 번역사 도구함’은 웹상에서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이런 도구를 쓰면 원문과 번역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는데, 번역가들이 데이터베이스를 서로 참고할 수 있다면 번역 수준을 높이고 오역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번역가의 필수품인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연간 이용료가 215파운드(약 36만원)인데, 대학 도서관에서 기관 구독을 하고 있다면 동문회원으로 가입해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다. 번역가의 장비는 소박하다. 컴퓨터는 워드프로세서와 웹브라우저만 잘 돌아가면 충분하다. 번역가가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은 머릿속이다.

노승영 생계형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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