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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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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필코 ‘멘갑’하세요

오역은 번역가의 운명
등록 2014-08-17 13:22 수정 2020-05-03 04:27

번역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성실함, 쪼잔함, 겸손함, 집요함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중요한 것이 ‘강한 멘털’이다. 번역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오역을 저지르게 되는데, 독자에게 오역을 지적받을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면 번역가로 오래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역을 안 하면 되잖아?’라는 말을 들으면 번역가는 억장이 무너진다. 번역은 밑져야 본전이 아니라 잘해야 본전이다. 지금 번역하는 책은 원서로 496쪽인데 대략 문장은 6320개, 단어는 14만950개다. 6320개의 문장 중에서 기막힌 표현이 100개이고 오역이 100개이면 이 책은 오역투성이 번역서가 된다. 잠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다. 영어 단어와 한국어 단어를 맺어주는 14만여 번의 중매를 번번이 성공해야 한다. 번역을 ‘저자의 발자국을 따라 밟는 일’이라고 한다면 14만 걸음을 정확하게 내디뎌야 한다. 기계가 아니라면 몇 번쯤 잘못 디딜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기계적 직역이 아니라면.
부끄럽지만, 내가 저지른 오역을 몇 가지 고백한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Roadside Picnic)에서 소년이 “Happiness for everybody! …Free! As much as you want!”라고 외치는 장면이 어떤 책에 인용되었는데 나는 “모두에게 행복을! …자유! 원하는 만큼!”으로 옮겼으나 번역가 윤원화 선생이 서평에서 “모두에게 행복을, 공짜로, 원하는 만큼”으로 슬쩍 바로잡아놓았다. 또 어떤 책에서는 “As black as any crow”라는 시구를 “까마귀처럼 하얀”으로 옮기기도 했다. 바로 위에 “눈처럼 하얀”이라는 구절이 나온다는 사실은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그 밖에도 여러 오역을 http://socoop.net에 ‘…정오표’라는 제목으로 올려두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한겨레 자료

무라카미 하루키. 한겨레 자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라는 속담은 번역에 꼭 들어맞는다. 번역가는 문장, 단어 하나하나마다 판단을 내려야 한다. 판단은 언제나 틀릴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판단을 회피하면, 텍스트를 해석하지 않고 원문 뒤에 숨으면 상당수의 오역을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장이 오역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실은 번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가 공진호 선생에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사진)는 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old sport’를 ‘올드 스포트’(オ-ルド·スポ-ト)로 음역했다고 한다. 그 어떤 대역어도 성에 차지 않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음역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이것은 번역이 아니다(따라서 결코 오역이 될 수 없다). 하루키의 시도가 의미를 가지는 길은 언젠가 ‘オ-ルド·スポ-ト’라는 단어가 일본어 사전에 등재되는 것뿐이다.

물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오역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번역가로서 최선을 다했다면, 사전의 마지막 의미까지 찾아보고 구글 마지막 페이지까지 검색하고 머리가 터질 때까지 고민했다면 자신의 판단을 믿고 당당하게 선택하기 바란다.

노승영 생계형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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