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테네시주 산악지대의 오래된 숲에 앉아 있다. 동이 트고 1시간이 지난다. 물음표 끝 같던 노루귀의 닫혔던 꽃봉오리가 열린다. 또 1시간이 지난다. 노루귀의 줄기가 곧게 펴진다. 이제는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다. 다시 1시간이 지난다. 줄기가 뒤로 기울고 위로 들린다. 갈겨쓴 필기체처럼 변한다. 개화다.
청교도 단풍나무, 횡재한 개미…
노루귀의 개화를 본 그날의 기다림은 3시간이었으나, 가을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듯 이 남자는 겨울부터 이곳을 드나들었다. 테네시주 시워니대학의 생물학 교수인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은 캠퍼스 내에 위치한 산, 그중 오래된 숲에 지름 1m 약간 넘는 원을 그린다. 그는 한 해 동안 이곳을 관찰하기로 한다. 아무것도 죽이지 않고 어떤 생물도 옮기지 않고. 그는 이 공간을 ‘만다라’라고 칭한다.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펴냄, 2만원)는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만다라 1년 관찰기다.
‘만다라’란 삼라만상이 담긴 우주다. 동양철학에 해박한 그가 이 공간을 만다라라 칭한 것은 겉멋이 아니다. 노루귀가 개화한 3월13일을 지나 4월22일이 되면 단풍나무와 히코리나무 꽃의 절정을 이룬다. 이 나무 꽃들의 섹스는 꿀과 색깔이 넘쳐나는 일 없이 청교도적이다. 한해살이가 곤충의 눈과 혀를 유혹해야 했지만 이들은 바람이면 된다(만다라는 진화의 갈래가 풍성하다). 나무 그늘에 개화하고 열매를 맺은 노루귀에는 개미 한 마리가 다가간다. 노루귀 열매 끝의 흰색 꼭지에는 엘라이오솜이 있다. 노루귀가 개미를 위해 준비한 별미로 온갖 영양분이 집결돼 있다. 횡재한 개미는 이것을 보금자리로 낑낑거리며 가져가고 못 먹는 씨는 퇴비 더미에 버린다. 발아하기에 가장 최적인 곳에 씨는 자리잡게 된다(만다라에서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전략적이고 치밀한 방법으로). 최근 마디개미가 외국에서 유입됐는데 이 개미 역시 엘라이솜에 유혹된다. 하지만 마디개미는 씨를 전파하는 데는 젬병이라 씨는 원주인, 그러니까 어미 근처에 머물게 된다. 어미와 자식의 생존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비극은 자식이 종종 패한다는 것(만다라는 가차 없는 생존의 장이다).
책 역시 과학지식과 생태철학과 시적 표현이 융합된 장이다. 저자는 눈(雪)을 보며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남들이 보게 한 케플러의 통찰을 이야기하고, 식물이 겨울을 나는 일을 칼을 삼키는 묘기에 비유한다. 사슴의 반추위를 이야기하며 반추위와의 평화를 깬, 미생물 조력자를 압살해야 고기를 얻는 목축업에 분노한다.
당신도 당신의 만다라를 만나라김성호 교수의 이 있고, 미국 생태주의 작가 바버라 킹솔버의 등 차곡차곡 쌓는 방식의 기록들이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자극적’이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부턴가 안산과 자락길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낯선 해변이나 사바나를 탐험하는 게 아닌데도 매일 새로운 자연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 작은 숲이 내게는 하나의 우주가 된 것이다. 안산은 원래 그대로지만 내가 변했다.” 당신도 당신의 만다라를 만나라.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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