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의 성’은 제주 남쪽의 해안 절벽 위에 ‘달팽이 껍데기’처럼 도사린 2층집이다. 애초 무슨 용도로 지어졌는지에 대해선 이설이 경합한다. 대통령 박정희의 경호원 숙소로 지어졌다는 설이 그 하나다. 실제 1969년에 건축된 이 건물은 지금의 파라다이스호텔 자리에 있던 박정희 별장지와 지척이다. 그 시절 제주에서 이만큼 공들여 건물을 지었다면 뭔가 비범한 쓰임새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론도 경호원 숙소설에 무게를 더한 듯하다. 박정희는 제주를 가장 빈번하게 방문한 통치자였다. 그가 제주를 처음 찾은 것은 군사반란이 성공하고 3개월이 채 안 된 1961년 9월12일. 그로부터 소라의 성이 완공된 1969년까지 그의 내도(來島) 횟수는 10차례에 달했다. (현학순, ‘박 대통령과 제주도’, 40)
박정희 경호원의 숙소였다는 풍문하지만 경호원 숙소설은 확인되지 않은 풍문에 가깝다. 현지에서 발급받은 건축물대장에는 주 용도가 ‘관광전망대’로 나온다. 대장에는 2차례의 소유권 변동 사실이 적혀 있다. 1991년 2월 서귀포 주민 김아무개씨로 소유권이 넘어간 뒤 2008년 1월 제주특별자치도로 귀속됐다(최초 소유자는 대장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시 관계자는 “처음부터 음식과 음료를 파는 전망대로 세워졌을 것이다. 경호원 숙소였다면 굳이 접근성이 좋지 않은 절벽 위에 지었을 리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건축가가 박정희와 불화했던 김중업이란 사실 역시 경호원 숙소설을 배척한다. 김중업은 5·16 직후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데모를 비판한 일로 곤욕을 치렀고, 유신 직전인 1971년엔 신문 기고문에서 판자촌 빈민들의 광주대단지(지금의 경기도 성남) 이주 정책을 공개 비판했다가, 주민 폭동 직후 정보 당국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강제 외유를 떠나야 했다.
김중업의 제주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1962년 6월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제1차 세계공원대회(미국 시애틀)에서 제주를 한국의 대표적 자연경관으로 소개했다. 당시 은 “열대·아열대·온대·한대 등 4지대의 기후를 겸하고 있는 제주도는 세계 어느 지방에서도 볼 수 없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는 김중업의 발언과 함께 그가 “제주 지방의 특수지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며 지하수의 분출 등도 낱낱이 설명했다”고 전한다.
김중업은 이 건물을 짓기 전 제주에 이미 몇 개의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주한 프랑스대사관, 서산부인과의원과 함께 김중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제주대 본관(1964년)이다. 곡선과 원의 미학으로 빚어낸 이 콘크리트 조형물은 프랑스 비평가 미셸 라공으로부터 “21세기를 연출했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미래의 건축 경향을 선취했으나 부실 시공과 관리 소홀, 해풍으로 인한 구조체의 부식과 파괴를 견디지 못하고 1996년 5월 철거됐다. 김중업은 이 밖에도 제주대 수산학부와 농학부, 중앙여중, 서귀포 골프장 클럽하우스 등을 제주에 남겼는데, 현존하는 것은 이곳 소라의 성이 유일하다.
김중업 건축의 황금기에 지어진 건물답게 소라의 성에는 1960년대 후반 그가 구사했던 특유의 문법과 어휘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건물 서쪽에 벽돌로 쌓아 붙인 원통 기둥은 김중업이 건축가의 전범으로 삼았던 르코르뷔지에의 롱샹 성당 수직탑을 떠올리게 하지만, 전반적 형태는 제주의 전통 돌탑(방사탑)에 가깝다. 직선이 아닌 원호와 곡면을 주로 사용한 평면 구성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서울 신당동 서산부인과의원과도 유사한데, 왜소한 사각창을 불규칙하게 배열한 서산부인과의원과 달리 바다와 면한 2층 외벽을 시원스러운 수평창으로 처리한 것이 눈길을 끈다. 수평창을 두른 2층의 돌출 부위는 종유석을 닮은 4개의 기둥으로 지탱된다. 서산부인과의원의 발코니 기둥과 같은 형식인데, 표면에 조약돌을 촘촘히 박아넣어 오돌토돌한 해양갑각류의 껍데기 부위를 연상시킨다. 외벽은 ‘제주석’이라 불리는 거친 현무암을 다듬어 쌓아 제주의 지역성을 구현했다.
남방해역 망망대해가 한눈에내부 공간 역시 바닥을 제외하고 직면을 좀체 찾아볼 수 없다. 원형이 훼손됐다고는 하나, 원의 형태로 구획된 작은 방과 음표 꼬리처럼 물결치는 격벽들은 “집은 노래 불러야 한다”는 김중업의 건축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투박한 제주석으로 쌓은 계단실 역시 완만한 나선을 그리며 2층을 거쳐 옥상으로 이어지는데, 밝고 트인 외부 공간에서 좁고 어두운 내부로 진입할 때면 마치 단단한 소라고둥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김중업은 언젠가 일본의 한 건축잡지와 인터뷰하면서 1970년대 말 자신이 설계한 서울 한남동 주택을 ‘달팽이집’이라 소개한 적 있다. 그에게 달팽이 껍데기는 내부의 연체를 보호하는 작은 집의 다른 표현이었다. 부산 피란 시절 김중업은 친구인 시인 조병화를 위해 집을 설계한 뒤 ‘패각의 집’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는데, 이때의 패각이란 작고 따뜻하면서도 견고한 인간적 규모의 거처를 의미했다.
소라의 성이 지닌 독특함은 2층의 수평창을 통해 패각의 닫힌 이미지를 교묘하게 전복시킨다는 점이다. 현대건축에서 수평창은 경관에 대한 인간의 소유욕을 극단적으로 충족시키는 장치다. 창을 통해 이뤄지는 자연경관의 포획은 외부를 부단히 내부화·식민화하려는 근대적 욕망과 맞닿아 있는데, 이 점은 무엇보다 수평창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란 사실과 결부된다. 그것은 건축물의 외벽이 수직하중을 지지하는 노역에서 해방됨으로써 비로소 등장했다. 기둥과 보만으로 구조물을 지탱하는 철근콘크리트 공법이 보편화된 덕이었다.
소라의 성 2층의 창문 앞에 서면 남방해역의 망망대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창이란 프레임을 통해 외부는 ‘내부에 포획된 외부’로 재탄생한다. 이때 외부는 위험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프레임에 갇힌 ‘순치된 스펙터클’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 건물에 투사된 당대의 무의식은 이윤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 부단히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자본의 욕망, 힘의 공백 지대를 향해 팽창을 거듭하는 권력의 정념과도 유사하다.
건물이 지어질 당시의 제주는 근대에 상상된 전형적인 섬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근대가 바라본 섬은 모든 전통과 가치로부터 단절된 곳이자 자연 상태의 풍요로움을 간직한 공간, 따라서 개화한 육지인의 합리적 의지에 따라 질서지워지고 건설돼야 할 고립된 미개척지였다. 영국 근대소설의 기원이 되는 에서 섬이란 공간이 문명인의 모든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처녀지, 근대적 주체의 의도와 계획을 마음껏 투사할 수 있는 백지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것이 전형적인 예다.
제주 역시 일찍부터 받는 것 없이 주는 땅이었다. 역사에 편입된 초창기부터 그랬다. 백제·신라·고려·조선. 왕조는 바뀌었지만 왕실로 진상되는 공물 생산지의 역할엔 변함이 없었다. 섬이 ‘중앙’으로부터 받는 것은 유배 맞은 정치범들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상의 ‘내부 식민지’였다.
“오라! 이 처녀지에 낙원을 건설하라”근대의 문턱을 넘어선 뒤에도 섬의 운명엔 변함이 없었다. 육지 권력은 끊임없이 손만 벌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수탈자의 대열에 민간 자본이 가세했다는 정도다. 식민지 시대부터 조짐은 엿보였다. 1937년 는 ‘제주 종횡관’이란 특집물을 연재한다. 보성전문학교 교수 최용달이 쓴 이 글은 제주의 현실을 기후와 자연, 풍속, 사회조직 등 10개 소주제로 나눠 살폈다. 글에 드러난 제주라는 공간은 “자연적 조건과 인정풍속(人情風俗)이 일본과 몽고의 그것을 합해놓은 것 가튼 (…) 대륙과 섬나라의 인상을 겸해서 가진 남명(南冥)의 고도”다.
“그들은 아즉 너무나 원시적이고 비문화적 생활을 하고 잇다. 그들은 비록 순박하나마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잇다. 만일 그들의 생활이 저러트시 순박하고 순진한 채로 그러나 현대과학으로 조성될 수 잇는 유족하고 윤택한 문화적 생활에로 향상할 수 잇다면 그것은 오늘의 제주가 아닌 이상향으로서의 제주이리라.”
신문이 제주 기획을 연재한 데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1937년 2월 조선총독부가 제주 개발계획을 세운 뒤 실지 조사를 벌이고 예산안까지 편성하면서 제주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던 것이다. 총독부의 구상은 섬에 항만과 도로를 놓고, 목축·어업·농업·발전(發電) 기지로 육성한다는 내용이었다. 제주는 미개한 절해(絶海)의 정치범 유배지에서 일약 “조선 남단의 보고(寶庫)”로 떠오른다.
그러나 총독부의 제주 개발은 성사되지 못했다.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조선 전체가 전시체제로 전환된 탓이었다. 개발 논의가 재개된 것은 1963년 ‘제주도건설연구위원회’가 설치되면서부터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지시였다. 이즈음 엔 ‘밖으로 손짓하는 탐라의 꿈’이라는 특집 기사(1964년 7월13일)가 실린다. 기사 전체가 ‘자원’ ‘영토’ ‘이방지대’ ‘처녀지’ ‘낙원’ 같은 식민주의 용어로 점철돼 있다.
“무한한 자원을 간직한 바다가 있고 광활한 영토가 있다. 아름다운 신화와 전설이 가는 곳마다 아로새겨져 있다. 계엄령이나 산아제한 같은 굴레는 아예 생각조차 못해보는 이방지대. 여기 제주의 섬에는 누천년의 고요가 가시고 개발에의 고동이 용솟음친다. (…) 삼다의 섬 제주는 이제 뭇사람을 오히려 무색하게 할 만한 웅도를 품에 안은 채 밖으로 손짓하고 있다. ‘오라! 그리고 이 처녀지에 낙원을 건설하라!’”
길들여질 수 없는 외부, 자연의 복수실질적 개발은 1970년 ‘제주도 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이 수립되고, 1973년 중문 관광단지와 관광 기반시설 조성을 내용으로 하는 ‘제주도 특정 지역 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본격화됐다. 공항과 항만이 확장되고 도로와 통신시설도 확충됐다. 1980년대 들어서는 국민 관광을 기반으로 국제 관광을 활성화한다는 목표 아래 3개 관광단지와 14개 관광지구가 지정됐다. 가처분소득이 늘고 관광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외지인의 섬 방문과 현지 지출도 크게 늘었다. 문제는 개발을 통해 만들어진 이윤이 외부 투자자들 손에 독점되고, 관광 주도의 개발로 인해 산업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지역 경제가 외지 투자자의 경제활동에 종속되는 양상을 띠게 됐다는 점이다. 개발이익을 노린 외지 자본에 의한 토지 잠식과 투기 행태도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식민화의 전형적 수순이었다.
소라의 성은 그사이, 전망대에서 레스토랑, 해산물 식당으로 쓰임새가 바뀌어오다 2009년 제주올레 사무국이 입주해 1층은 올레 안내관, 2층은 사무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3년 건물(연면적 234m²)을 포함한 주변 1만3985m²가 재해위험지구로 지정된 뒤 철거론에 휘말려 한동안 빈집으로 방치되기도 했다. 전망대에서 식당, 도보여행 사무국으로 용도를 갈음해온 이 건물의 생애사엔 섬이라는 ‘외부’를 전유해온 육지 권력의 욕망과, 제주라는 이질적 공간을 소비해온 패턴의 변천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그것은 이국적 풍광 자체를 소박하게 조망하는 방식에서, 패키지로 먹고 즐기는 포드주의적 위락 관광을 거쳐, 다양화된 취향과 기호에 맞춘 유연화된 스펙터클 소비 형태로의 변화다.
최근 서귀포시는 이 건물에 대해 4년 만에 안전 진단을 벌였다. 올레 사무국의 이수진 실장은 “건물 자체는 구조적 결함이 없지만, 해안 절벽 위에 지어져 지반이 취약한 것이 문제”라며 “큰 파도가 치면 창문은 물론 책상 위 사무집기들이 흔들릴 정도”라고 했다. 파도는 이미 절벽에 몇 개의 해식동굴을 만들어놓았다. 침식은 미세하되 부단히 이뤄지고 있다. 길들여질 수 없는 외부, 자연의 복수라고밖엔 달리 볼 도리가 없다.
이세영 정치부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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