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음과 떠남의 욕망이, 한순간/ 망설임의 몸짓으로 겹쳐지는 곳에서/ 휘파람 소리처럼 둥지는 태어난다”(유하,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태고의 집은 움집이었다. 한강변 선사유적이 증언하듯, 그것은 구조물이라기보다 초목으로 변통한 새 둥지에 가까웠다. 집의 시원이 수렴하는 궁극의 형식이란 점에서, 둥지가 품은 것은 뭇새들의 몸뚱이가 아닌 ‘집의 이데아’였다. 오늘날 그 이데아에 충실한 주거 형태를 꼽으라면 유목민의 게르일 것이다. 게르 안에선 머묾과 떠남의 욕망이 여전히 경합한다. 견고함과 내구성을 지닌 건축물은 정주의 욕망이 이주의 충동을 제압하고 나서야 비로소 출현했다. 정주 문명의 등장은 건축물에 ‘상징’이란 새 임무를 부여했는데, 이로써 건축은 주거와 수용이란 본연의 기능에 더해 시간의 침식을 견디며 문명의 찬란함과 권력의 압도성을 표상하는 매체가 되어야 했다. 그것의 최종 형식은 머묾의 욕망이 도달한 극단, ‘기념비’였다.
기념비, 머묾의 욕망이 도달한 극단‘기계 제작자’를 자처한 현대 건축(르코르뷔지에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했다)에서도 기념비를 향한 욕망은 거세되지 않았다. 파괴와 소멸, 가차없는 단절이 지배하는 현대성의 덧없는 공허함에 비례해 초월과 영원성에 대한 갈망 역시 부단히 팽창했던 탓이다. 시인 보들레르는 이같은 현대성의 이중 구조를 일찌감치 간파한 인물이었다. “모더니티의 한쪽은 찰나적·일시적·우연적인 것이며, 다른 한쪽은 영원불멸한 것이다.” 현대 예술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들 속에 존재하는 영원불멸의 성분들을 포착해 가시화하는 일에 기꺼이 복무했다.
건축가는 이 과업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집단이었다. “건축은 공간의 용어로 표현된 시대 의지”라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정의처럼, 건축이란 행위는 시간의 일시성을 붙들어 공간 속에 고정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던 까닭이다. 문제는 시간을 공간화하려는 건축의 욕망이, 힘의 영속을 희구하는 권력의 속성과 불가원의 친화성을 갖는다는 점이었다. 건축가의 조형 의지와 권력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현대의 기념비’는 탄생했다.
1964년 서울 남산 자락에 들어선 자유센터는 1960년대가 낳은 대표적인 기념비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독특함은 그 기념의 대상이 과거의 영광스런 기억도, 역사적 실존 영웅도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센터는 반공이라는 동시대 이데올로기에 헌정된 ‘정치적 신전’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많은 신생국들이 국립묘지나 박물관, 대규모 공공청사 건립을 통해 국가권력의 위엄과 힘을 과시하고, 국민적 정체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시도다.
자유센터 건립이 결정된 것은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지 1년이 지난 1962년 5월이다. 아시아반공연맹 임시총회를 개최한 군사정부는 아시아반공센터를 서울에 유치해 반공지도자 양성, 이론체계 수립, 게릴라요원 훈련 등을 수행케 하자고 제안해 참가국의 동의를 얻어낸다. 이로부터 4개월 뒤 국민모금 1억5천만원에 국가보조금 1억원을 더해 공사에 들어가는데, 국가보조금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가 기업인들로부터 반강제로 거둔 돈이라는 게 정설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87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군사정부가 이같은 대규모 역사를 벌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정희와 반공주의 동원체제박정희는 해방 이후 남로당에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집권 초기부터 집요한 이념 공세에 시달렸다. 5·16 직후 미국이 쿠데타 승인을 주저한 것도 박정희의 이념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안팎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박정희가 취할 선택지는 자신의 확고한 반공 의지를 확인시키는 길밖에 없었다. 혁명공약 1조로 ‘반공’을 내건 것이나, 5·16 직후 파견된 북한의 대남 밀사 황태성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한 것도 이런 속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뒤 처음으로 이루어진 국가 건축 프로젝트의 추진 배경을 통치자의 콤플렉스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역사의 사사화(私事化)란 덫에 빠질 위험이 농후하다. 군사반란이란 비정상 경로를 통해 권력을 취득한 건 사실이지만, 박정희 체제 역시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자장 안에 존재한 근대 자본주의국가였다. 보다 정교한 해명을 위해선 박정희 통치 초기 이뤄진 반공 이념의 전면화를 근대국가에 주어진 보편 과제, 다시 말해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 전략의 틀 안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강제의 철갑을 두른 헤게모니”라는 그람시의 정의대로, 근대국가는 완전한 강압도, 완전한 동의도 아닌 ‘강압과 동의의 복합체’로 항존하기 때문이다(적나라한 강압 통치의 사례로 거론되는 전두환 정권 역시 지역주의라는 동의 기반을 갖고 있었다).
18년을 버틴 박정희 체제였지만, 지배의 내구성이 처음부터 양호했던 것은 아니다. 쿠데타 정권이란 태생적 한계는 그의 집권 기간 내내 통치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원죄로 작용했다. 통치의 안정을 위해선 지배에 대한 동의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다행히 그 시절 박정희에겐 동의의 토대 구축에 필요한 정치적 자원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1940~50년대를 통해 형성된 한국 사회의 원초적 반공의식이었다.
해방 공간과 정부 수립 초기, 제주 4·3과 여순 사건 같은 ‘준내전’을 경험하며 반공은 이미 ‘국민의 자격 조건’을 심사하는 핵심 기준으로 자리잡았다. 인민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권력 앞에서 ‘국민’이라는 공동체의 성원으로 승인받기 위해선 자신이 ‘비국민’(빨갱이=공산주의자)이 아님을 먼저 입증해야 했다. 이렇게 국민의 의식 회로에 자리잡은 반공은 통치의 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어김없이 사회의 전면으로 소환돼 위력을 발휘했다. 이런 상황은 한국전쟁에서 빚어진 학살과 보복의 악순환을 거치며 한층 강화됐다. 반공주의에 대한 일체의 저항이 무력화되면서 반공은 확고한 국민적 의사(擬似) 합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박정희가 한 일은 1950년대의 원초적 반공주의를 ‘이념화된 반공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체제를 떠받친 군부라는 안보기구의 이해와 직결된 사안이기도 했다. 나아가 국가에 의한 반공주의의 이념화는 “반공주의의 세대 간 전승과 재생산”(조희연)을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1960년대 들어 반공궐기대회 같은 대중 동원, 교련과 국민윤리를 통한 훈육, 반상회나 관변 단체 등을 활용한 사회제도적 동원이 활발하게 시도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처음 추진한 국가 건축 프로젝트가 자유센터였다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화려한 외관, 단조로운 기능설계자로 낙점된 이는 갓 서른을 넘긴 일본 유학파 김수근이었다. 그는 앞서 워커힐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군사정권의 2인자 김종필과 긴밀한 교분을 맺고 있었다. 프로젝트의 전권을 위임받은 김수근은 1962년 르코르뷔지에가 인도 찬디가르에 지어올린 주의회 의사당을 참조했다. 입면의 비례와 지붕의 곡면 처리 같은 르코르뷔지에의 조형언어가 고스란히 이식됐다. 건물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하늘을 향해 말려올라간 콘크리트 지붕과 그것을 지탱하는 수직의 열주들이다. 납작한 평면 지붕을 사분원에 가깝게 말아올림으로써 부력과 중량감을 동시에 확보하고자 한 건축가의 조형감각이 돋보인다.
앞서 김수근이 워커힐 힐탑바에서 시도한 바 있는 노출콘크리트 마감법(표면에 별도의 외장재나 도색 재료를 쓰지 않고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공법)은 이 건물에서 한결 완성된 형태로 자리잡았다. 콘크리트 타설을 위해 김수근은 시멘트는 물론 거푸집용 목재도 일본에서 수입해 썼는데, 당시 국내의 재료·기술 수준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김수근은 유럽에서 유행하던 노출콘크리트 마감법을 일본 유학시절 은사인 단게 겐조를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전후방에 배치된 넓은 광장은 대중 집회를 위한 쓰임새보다는, 좌우폭이 넓은 건물 전체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눈에 관조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다. 광장에서 바라본 자유센터는 곡면 지붕의 압도적 위엄과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수직 열주들이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과 결합해 고대의 거석 구조물에서와 같은 초월적 숭고미를 발산한다.
이 건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외관의 화려함에 견줘 내부 기능이 단조롭다는 점이다. 전면부의 광장에서 시작한 중앙 계단은 곧바로 3층의 중앙홀로 연결된다. 널찍한 로비는 4·5층을 수직으로 관통해 천장까지 이어지는데, 이런 구조 탓에 내부에 수용된 사무 공간은 대지 면적에 비해 협소하다는 느낌을 준다. 안과 밖의 이같은 불균형은 이 건물이 애초부터 기능과 용도보다는 오로지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음을 짐작게 한다. 자유센터는 “형식 자체가 내용이자 목적인 건물”(강혁)이었던 것이다.
건물에 대한 건축가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자유센터는 1985년 1월15일 ‘한국의 명건축’이란 연재 기획의 하나로 다뤄졌는데, 첨부된 상자 기사에 담긴 건축가의 변은 이렇다. “한국의 기념적 공공건축으로서 처음이자 대규모의 것으로서 (…) 르코르뷔지에의 조형적 매력과 한국적 전통, 현대건축의 표현주의적 전율을 심하게 나타낸 것이다. 실용성과 예술성, 기념성을 자유·반공이란 시대적 요구에 어떻게 대응시킬 것이느냐가 과제였다.(…) 건축을 예술이란 차원으로 끌어올리려 도전하는, 힘주어 만들어낸 시대의 소산이라 자부하고 싶다.”
완공 2년 뒤인 1966년 이곳에선 제12회 아시아민족반공총회가 열렸다. 1967년에는 세계반공연맹(WACL) 사무국이 설치됐고, 얼마 뒤엔 세계반공연맹 총회도 치러졌다. 정권이 바뀐 1980년대에는 주로 공무원·학생·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반공 교육과 해외 출국자 안보 교육 공간으로 활용됐다. 현재 이 건물의 소유주는 1989년 한국반공연맹에서 이름을 바꾼 한국자유총연맹이다.
새는 날아가고, 집착은 여운처럼 남아냉전이 해체되고 남북 간 이념 대결이 쇠퇴하자 건물의 용도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관 주도 이념행사가 급감하며 발생한 잉여 공간은 웨딩홀과 식당, 양주클럽, 택배회사 등에 임대됐다. 전면부의 광장 역시 택배 차량의 적치장과 주차 공간, 드라이브인 극장으로 용도가 바뀐 지 오래다. 이 건물이 보유했던 이념성의 표지는 현재로선 후면 출입구에 걸린 ‘한국자유총연맹’이란 건물주의 명패 정도다. ‘자유’와 ‘반공’이란 기표의 의미론적 연결 고리가 취약해지고 건축물의 쓰임새마저 바뀌어 버린 지금, 이 건물에서 ‘반공’이란 기표를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건축물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그곳을 점유하고 이용하는 자들의 ‘공간적 실천’이란 진리가 ‘이념의 기념비’를 욕망했던 콘크리트 관제 건축물에서도 고스란히 관철되고 있는 셈이다.
정치적 기획으로 탄생한 이념의 신전은 이제 몰락해간 권력의 욕망을 폭로하는 ‘이데올로기의 폐허’로 남아 시절의 덧없음을 쓸쓸히 증언한다. 그러나 건축물 본연의 물성이 지속되는 한, 형태의 숭고미가 빚어내는 기념비성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미망처럼 빈 둥지 위를 감도는 집착의 그림자처럼.
“새는 날아가고/ 집착은 휘파람의 여운처럼/ 둥지를 지그시 누른다”(유하, 앞의 시).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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