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취와 증여의 대가는 참혹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카우카수스산 돌벼랑에 쇠사슬로 결박된 채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인간이 불을 갖게 해선 안 된다는 제우스의 금기를 위반한 대가였다. 불을 소유하는 순간 인간은 신의 지배 권역을 벗어나 통제 불능의 자유 지대로 탈주하게 될 것임을 제우스는 간파하고 있었다. 그 예상대로 불은 인류의 생존 양식을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았다. 거주 영역을 확장하고, 혹독한 빙하기를 견뎠다. 이 왜소하고 겁 많은 군거 동물은 마침내 행성의 지배자가 됐다. 불이 있어 가능했다. 천문학적 확률의 우연이 겹쳐 가능했을 불의 발견은 인류사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불은 문명이었다.
레닌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더하기 전기”불을 수중에 넣고 40만 년이 지난 뒤 인류는 새로운 에너지, 전기를 발견했다. 시작은 전기 불꽃을 최초 관찰한 라이프니츠였다. 뒤이어 빛과 전기가 동일한 것이란 사실이 프랭클린의 실험으로 증명됐고, 19세기가 되자 전기와 연루된 창안과 발명이 잇따랐다. 패러데이가 발전기(1831년)를, 데이비드슨은 전기 엔진(1842년)을 만들었다. 플랑테는 축전지(1859년)를 창안했고, 지멘스는 발전기(1866년)를 실용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그 정점은 1882년 에디슨이 고안한 중앙발전소와 전력 공급 시스템이었다.
전기는 유용성에서 모든 에너지원을 압도했다. 기계 작업에 필요한 모터를 구동하고, 방열기를 달구고, 전등불을 밝혀 “달빛을 살해”했다. 그뿐인가. 엑스(X)선이나 자외선, 셀레늄 광전지 같은 다양한 형식으로도 쉽게 변환 가능한 게 전기였다. 말 그대로 그것은 생산력의 중핵이자, 전능의 에너지요, 현대성(Modernity)의 총아였다. 오죽하면 사회주의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조차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더하기 전기”라는 유시까지 남겼겠는가. 전기와 더불어 꽃핀 현대성은 20세기 문턱을 넘어서며 한층 가파른 질주를 감행하는데, 그즈음 현대 기계문명의 광휘에 매료된 일군의 예술가들이 출현한다. 이탈리아 미래파다.
‘20세기 프로메테우스교’로 불릴 법한 이 사제 집단의 창도자는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1876~1944)였다. 그가 쓴 ‘미래주의 선언’은 1909년 2월 프랑스 일간 1면에 실리며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선동조의 격문으로 쓰인 11개 항의 선언문은 “격렬한 전기 불빛들로 이글거리는 병기고와 조선소의 전율하는 밤의 열정을, 그들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곡선들 곁의 탐욕스런 구름을… 열광하는 군중처럼 환호하는 비행기의 날렵한 비행을 우리는 노래할 것”이라는 비장한 단언으로 최후의 구두점을 찍었다. 마리네티는 이 운동의 명칭을 두고 역동주의(Dynamism), 전기(Electricity), 미래주의(Futurism) 사이에서 주저했다. 전기는 이들에게 역동성과 미래의 원천이자 현대성의 위대함을 증언하는 종교적 상징이었다.
미래주의는 발원지인 이탈리아반도를 평정한 뒤 런던과 모스크바, 도쿄를 거쳐 식민도시 경성에 당도한다. 처음 소개한 이는 시인 박영희였다. 1924년 49호의 ‘중요술어사전’이란 글에서 그는 미래주의의 기본 개념을 “강렬한 반항적 태도”와 “기성 예술에 대한 부정”, “운동”과 “속도”에 대한 찬미 등으로 정리했다. 발원 시점에서 15년이 경과한 뒤에야 대중에게 소개된 것은 식민지 조선에서 현대성의 개화 시기가 그만큼 지체됐던 상황과도 무관치 않았다(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첫 번째 전등이 밝혀진 지 24년이 지난 1911년까지도 전등이 설치된 가구 수는 전국을 통틀어 4456호에 불과했다). 미래주의의 교의가 한층 정교하게 제시된 것은 1929년 양주동에 의해서다. 그해 여름, 국내 제1호 화력발전소가 서울 마포에서 착공된다. 당인리발전소(현 서울화력발전소)다.
발전소, 기계의 몸을 입은 프로메테우스착공 17개월 만인 1930년 11월 발전용량 1만kW의 1호기가 완공됐다. 5년 뒤인 1935년 10월에는 2호기가 가동을 시작해 발전량은 1만2500kW로 늘어난다. 설비용량이 크지 않았던 것은 애초부터 도심 구간 전차에 동력을 공급할 목적으로 건설됐기 때문이다. 발전소와 마포의 전차 종점(지금의 불교방송국 자리) 사이 직선거리는 2km가 조금 넘었다. 문화사적으로 이 시기는 식민지 모더니즘의 흥기와도 겹쳤다. 스케이팅의 질주감을 노래한 ‘속도의 시’, 기차와 자동차가 빚어내는 쾌주의 미를 형상화한 ‘여행’과 ‘상공운동회’(이상 김기림)가 이때를 전후해 선보였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로 시작하는 이상의 ‘오감도’는 1934년 에 발표되기 무섭게 문학적 소요를 불러일으킨 ‘미래주의의 언어 폭탄’이었다.
전력 생산량은 적었지만, 발전소는 그 기념비적 위엄만으로도 식민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에 실린 1950년대 사진에서, 이 건조물은 한강변 저지대에 도사린 육중한 발전설비와 송전 철탑, 수직으로 융기한 원통 굴뚝이 어우러져 범접하기 어려운 남성미를 과시하고 있다. 동시대인들에게 발전소는 “단지 새로운 기술의 원동력이 아니라 (현대 기계문명의) 가장 주목할 만한 최종 생산물의 하나”(루이스 멈퍼드)였다. 이같은 발전소의 이념형을 완벽한 도상학적 구도 안에 구현한 것이 미래주의 건축가 안토니오 산텔리아(1888~1916)의 (1914년)다.
산텔리아의 드로잉은 요새처럼 견고한 콘크리트 몸체 위로 3개의 굴뚝 기둥이 솟아 있고, 철탑에 걸린 송전선들이 외부로 뻗어나가는 역동적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그에게 발전소는 미래주의 이념을 체현한 현대의 영웅이자, 기계의 몸을 입은 성육신 프로메테우스였다. 그것은 마리네티의 표현대로 “연기를 뿜는 고사포”를 달고 “신성한 전구의 시대”를 도래시켜 “부패한 달빛”으로부터 낡은 문명을 구원할 해방자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하지만 당인리발전소가 들어선 뒤에도 서울(경성)에서 소비하는 전력의 절대량은 북한 지역의 수력발전에 의존했다. 발전에 필요한 유연탄의 국내 생산이 이뤄지지 않아 발전 단가가 다른 연료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던 탓이다. 해방과 분단을 겪으며 북한으로부터의 송전이 중단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설비 증설은 불가피했다. 전쟁까지 겪으며 점령과 파괴, 복구와 가동을 반복한 발전시설은 1954년 미국 벡텔사로부터 화력 3호기를 도입함으로써 용량을 2만5천kW까지 끌어올린다.
1962년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마련되자 에너지 확충은 농업생산력 증대와 함께 성장 전략의 양대 축으로 자리잡았다. 국제개발처(AID) 차관 2002만달러에 내자 41억원을 더해 1966년 4호기(13만7500kW), 1967년 5호기(25만kW)를 잇따라 착공한다. 발전소 자료관에 남아 있는 5호기 건설 당시의 흑백사진을 보면, 도르래 쇠줄에 걸린 보일러 드럼을 상부에 설치하기 위해 철골 구조물에 매달려 작업 중인 노동자들이 보인다. 기계미학의 독특한 형식미를 빌려 노동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예찬했던 페르낭 레제(1881~1955)의 (1950년)의 이미지를 빼닮았다.
1970년대 서울 전력소비량의 75% 공급4·5호기가 완공되자 당인리발전소는 1970년 폐쇄된 1·2호기를 제하고도 설비용량이 41만2500kW에 달해 국내 최대의 발전기지로 떠올랐다. 당시 당인리발전소가 공급하는 전력은 서울 지역 전체 수요의 75%를 차지했다.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대 원자력발전이 본격화하자 발전소의 위상은 비상시 첨두부하를 감당하는 예비전력 기지로 하향 조정된다. 1982년엔 노후화된 3호기가 폐쇄됐고, 1993년 시설 전환 공사를 거쳐 연료를 저유황유에서 액화천연가스(LNG)로 교체해 공급하고 있다. 현재 이 발전소의 공급 전력은 서울 소비량의 3% 남짓에 불과하다.
정부 시책에 따른 지위 격하에도 이 시설물이 보유했던 과거의 영광은 건물 곳곳에 찬연한 자취를 남겨두고 있다. 오랜 기간 분진 섞인 일산화탄소를 방출했을 콘크리트 굴뚝은 굳게 발기한 남근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여기에 철층계가 외벽을 감아오르는 나선의 상승감이 더해져 이 구조물은 한동안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바벨탑’의 원형으로 간주됐던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Ziggurat·聖塔)를 자연스레 상기시킨다. 그뿐인가. 굴뚝이 뿜어내는 백색 증기, 티탄족의 골격과 근육을 연상시키는 철골과 배관 구조에선 천상의 존재를 향해 기계문명의 위력을 시위하는 듯한 거만함마저 엿보인다.
가동 중인 4·5호기 서쪽 부지에선 지난 10월부터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다. 새 발전설비를 지하에 묻고, 기존 시설은 화력발전소에서 갤러리로 변신한 영국 테이트모던의 선례를 따라 문화창작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정부 쪽 복안에 따른 것이다. 리모델링안이 발표되자 주변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다. 주민들은 압력단체를 결성해 발전시설 전체를 서울 밖으로 내보내라는 청원을 냈고, 인접한 아파트 주민들은 발전소 담장을 허물어 아파트 단지와 직접 연결해달라는 민원을 관공서에 제출하기도 했다. 공공시설물을 사실상의 안마당으로 사유화하려는 ‘욕망의 연대’였다.
그러나 이들이 치솟을 재산 가치를 가늠하며 속된 기대에 부풀어 있는 동안, 반도의 변방에선 고향과 삶터를 지키기 위한 ‘절망의 연대’가 약자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 속에 휘청이고 있었다. 이것은 문명을 향한 프로메테우스적 기획이 내장하고 있던 운명적 비극성의 현실태이기도 했다. 서울을 위시한 대도시 주민들이 영위하는 현대 소비생활의 자유와 편리함 이면엔, 방사능 공포와 싸우고, 화석연료가 방출하는 분진·소음·매연의 고통을 서푼어치 보상금과 교환하며 생존해야 했던 발전소 입주 지역민, 대도시가 빨아들이는 전력의 이송로를 위해 재산권과 건강권마저 포기해야 했던 힘없는 소수자들의 희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태생부터 현대성은 대지를 수탈하고 공동체의 또 다른 내부를 식민화하는 데서 동력원을 찾는 야만성의 짝패였다.
모든 문명은 야만의 기록이다역설적이게도 이같은 현대성의 이면을 일찌감치 꿰뚫어본 이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첨단의 미’를 노래했던 한 모더니스트 시인이었다.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그는 풍선보다 가볍게 이륙하는 헬리콥터의 ‘자유’에서 ‘비애’를 읽어낼 만큼 예리한 촉수의 소유자였는데, 그가 감지한 비애는 현대성의 이상과 한국적 현실의 아득한 거리가 빚어내는 ‘절망’의 표현이자, 그 자유의 문명을 제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변방의 타자들이 지불해야 했던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린 설움”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는 당인리 5호기가 준공되기 1년 전인 1968년 불의의 윤화로 세상을 뜬다. 발전소가 지척인 마포 구수동에서 살다 죽은 시인의 이름은 김수영(1921~68)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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