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이었을망정 4·19는 축복이었다. 섬약한 반도의 지식인들은 비루한 이 세계사의 변방에도 ‘시민’이란 근대적 정치 주체가 실존할 수 있음을 비로소 체감했다. 독재자를 몰아낸 주체 세력 역시 자신들의 행위를 ‘시민혁명’이라 이름 붙였다. 환희는 그러나 순간이었다. 1961년 5월, 도강해온 반란군 탱크 앞에 혁명이 궤주하자 시민도 따라 죽었다. 광장은 닫히고 거리에는 ‘반공’과 ‘질서 확립’ 따위의 병영식 구호들만 난무했다. 그 환멸의 시간을 견디며 시인 김수영은 썼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그 방을 생각하며’)
시민의 죽음과 ‘관제 시민’의 시대횡사한 시민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소시민’이었다. 그들은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고, 불의를 비판하고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기보다 일신의 이익이 훼손될까 전전긍긍하는 ‘모래보다 왜소하고 먼지보다 가벼운’ 존재들이었다. 소시민의 옹졸함에 대한 탄식과 자학이 횡행하는 사이, 권력자들은 혁명의 소요 상황을 항구히 봉쇄하기 위한 새로운 주체 형성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권위에 순응하고 권력에 맹종하는 관제 시민, 정치학자 정상호의 표현에 따르면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투철한 국가의식과 반공정신을 내면화한 종속적 신민”이었다. 자유와 존엄을 쟁취하기 위해 국가권력과 일전을 불사하는 각성된 정치 주체인 시민은 사실상 도시라는 행정단위의 거주민 차원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시민이 정치적 권리 주체로서 역사적 시민권을 회복하기까지는 그로부터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 전환을 가능케 한 것은 권력이 짜놓은 시민적 질서의 관계망 안에서 변변한 자리 하나 점유하지 못했던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희생이었다. 그들은 국가권력의 원초적 폭력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시민’으로 정체화했고, 외로운 항전과 비장한 최후를 통해 망실됐던 정치적 주체의 복권을 시적(詩的)으로 성취했다. 그 역사적 귀환의 현장 한가운데 광주시민회관이 있었다.
광주시민회관은 1971년 4월 광주의 제1호 도시공원인 광주공원 경내에 세워졌다. 설계는 임영배(1932~2008) 당시 전남대 교수가 맡았다. 그는 전쟁 중이던 1951년 전남대에 입학해 일본 유학파인 김한섭(훗날 홍익대·중앙대 교수 역임) 밑에서 근대 건축의 문법과 어휘를 익힌 광주 지역의 1세대 건축가다. 그의 스타일은 1세대 국내파 건축가들이 대체로 그렇듯, 르코르뷔지에와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첫 작품인 전남대 공대 2호관(1960년대 말) 역시 독일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사(校舍)를 참조한 것이었다.
임영배가 시민회관 설계에 착수한 1970년은 전국의 지방도시에서 시민회관 건설이 경쟁적으로 이뤄지던 시기다. 제주(1964년), 전남 순천(1968년), 경기도 수원(1970년)이 광주에 앞서 시민회관을 지어올렸고, 서귀포(1973년), 부산(1973년), 인천(1974년), 대구(1975년)가 뒤를 이었다. 중앙정부도 시민회관 건립을 적극 지원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상당 부분 해결되면서 집회·공연용 복합문화시설에 대한 시민적 수요가 급증했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다. 그러나 옥내 집회를 위한 공공시설물의 건립은 누구보다 국가권력에 절실한 사업이었다. 반공과 개발주의라는 양대 동원 전략을 통해 지배 기반의 취약성을 보완하려 했던 군사정권으로선 대중의 정치·사회·문화적 동원을 뒷받침할 물리적 시설물의 확보가 시급했던 것이다.
곡면의 파사드… 전통 현악기를 닮은 외형이렇게 지어진 광주시민회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연면적이 1만395㎡였다. 연면적으로 치면 부산(1만2664㎡)보다 작고, 대구(9989㎡)·대전(7632㎡)·인천(7533㎡)보다는 컸다. 시민회관이 입지한 광주공원은 광주천에 면한 야트막한 구릉으로, 정상부에는 1961년 조성된 현충탑과 추모광장이 있었다. 건물은 추모광장 아래 있는 중앙광장 북서쪽에 세워졌는데, 전면이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의 남쪽 능선을 바라보며 광장을 품는 형세로 자리잡았다. 평면은 대지 형태에 맞게 앞부분이 넓고 후면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사다리꼴이었다. 메인 건물 우측에는 반원형으로 전면부를 돌출시킨 부속건물을 이어붙여 공간 활용의 효율성을 높였다.
외형은 과도한 장식을 피하고, 행사·공연 기능에 충실한 극장 양식을 취했다. 다만 메인 건물의 파사드(전면부)를 완만한 호(弧)로 둘러 돌출시킨 것이 특징적이다. 주목할 부분은 파사드의 곡률(휨의 정도)이 전통 현악기인 가야금의 울림통 표면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여기에 아홉 줄의 수직 루버를 악기의 현처럼 표면에 부착해 ‘예향’이란 광주의 지역성을 단아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파사드의 윗부분에는 채광 용도의 원형창 8개를 뚫었는데, 표면의 수직 루버와 어우러져 내부에서 공명하는 음향을 외부로 방사하는 현악기의 울림구멍을 연상시킨다.
건물은 1970년 8월1일 착공해 이듬해인 1971년 4월17일 완공됐다. 개관식에 이어 열린 첫 번째 공식 행사는 ‘4·19 의거 11주년 기념식’. 정치적 목소리가 철저히 배제된 관제행사였다. 당시 는 학교별로 할당된 시내 중·고교생 800여 명이 참석했다고 전한다. 실제 이곳에선 간간이 마련되는 문화영화 상영과 음악회 등을 제외하면 지역 행정기관이나 관변단체 주관 행사가 주로 열렸다. 1970년대 신문 기사는 각종 국가기념일 행사를 위시한 유신헌법 설명회, 총력안보 궐기대회, 유정회의원 지역회의, 승공지도자 안보단합대회 등이 단골로 열렸다고 기록한다. 시민회관은 ‘시’라는 행정단위에서 운영되는 복합공연시설을 이르는 명칭이었을 뿐, 토론하고 참여하고 저항하는 권리 주체로서의 시민 개념과는 아무런 의미 연관도 갖지 못했던 셈이다.
1980년 광주시민회관은 그 이름에 합당한 역사성을 비로소 획득한다. 피의 학살이 시작되고 사흘이 지난 5월21일 오후였다. 시민회관이 있는 광주공원 앞 광장에는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나주·화순·목포 등으로 진출했던 차량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차에는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노획한 총기와 탄약이 적재돼 있었다. ‘5월 광주’를 기록한 사료집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약술한다. “21일 오후 3시쯤부터 광주공원 계단 앞에는 엘엠지(LMG) 기관총이 설치됐고, 4000여 자루의 카빈총이 쌓여 있었다. 총기 사고를 막기 위해 젊은이들에게만 총을 나누어주고 총기 사용법을 비롯한 간단한 전투교육을 시켰다.”()
같은 날 오후 5시쯤에는 시민회관 앞 중앙광장에서 계엄군의 학살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 자위대가 편성됐다. 이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불렀다. 처자식이 없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6개조가 편성됐는데, 조원 한 사람당 태극기 1장과 카빈소총 1정, 실탄 36발, 탄창 2클립이 지급됐다. 작가 황석영이 대표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는 당시 편성된 시민군의 출신 배경을 한결 자세하게 적고 있다. “10대 후반과 20대가 주류를 이루었고, 30대와 40대 후반까지도 있었으며… 그들의 직업은 직접 확인할 수 없었지만, 대부분은 노동자, 목공, 공사장 인부 등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거나 구두닦이, 넝마주이, 술집 웨이터, 부랑아, 일용 품팔이 등등이었다. 또한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도 많았고 가끔은 예비군복을 입은 장년층들도 보였다.”
시민군과 ‘난입’의 정치학회관 일대에 시민군 본부가 들어섰고, 5월24일 도청으로 통합될 때까지 시내 순찰과 차량 등록 등 일시적이나마 치안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이렇게 모인 시민군은 항쟁 후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권유에 따라 상당수가 무기를 반납하고 귀가했지만, 일부는 마지막까지 저항 거점을 지키다 최후를 맞았다.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이 5월27일 아침 수도군단 상황실에 타전한 ‘광주상황보고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03:30 작전 개시/ 04:11 도청에 3공수 투입/ 04:30 광주공원 7공수 투입/ 04:55 도청 완전 점령/ 05:05 광주공원 완전 진압/ 05:22 도청 잠적 폭도 소탕 완료.”
죽음이 예견되는 상황에서조차 총을 내려놓지 않았던 그 절박함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시인 황지우는 1980년대 초반 광주일고와 경북고의 야구경기 관람기를 빌려쓴 시 한 대목에서 광주의 시민군을 편파 판정에 격분해 그라운드로 ‘난입’한, 앞뒤 재지 않는 청년들에 비유했다. “숫제 윗옷을 벗어버린 두 청년은 114M 외야석에서 구장으로 뛰어내린다./ …/ 주심에게 항의하러, 외야 쪽에서 홈으로 달려들어온 휴가병은, 전경 경비대에 그대로 안긴 채 들려나간다./ 관중은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 “아마, 제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도 다 저런 사람들이었을 거야.””(‘5월 그 하루 무덥던 날’)
말 그대로 그것은 ‘난입’이었다. 난입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자격이나 근거도 갖추지 않은 채 장(場)에 뛰어드는 정치적 행동”(철학자 고병권)을 가리킨다. 날품팔이, 부랑아, 구두닦이, 노동자. 애초부터 필드로 난입하지 않고선 목소리를 낼 기회 자체가 박탈된 사람들이었다. 오랜 기간 그들의 목소리는 누구에 의해서도 대표되지 않았고, 국가권력엔 정치·사회적 동원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역사의 그라운드 한복판에 총을 들고 난입한 것이다. 오랜 차별과 야만적 국가폭력에 노출된 지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킨 것은 19년 전 반란군 탱크에 짓밟혀 비명횡사한 ‘시민’이라는 이름이었다.
항쟁은 진압됐지만, 난입자들이 온몸으로 현을 튕겨 빚어낸 비극적 선율은 회관에 뚫린 8개의 울림구멍을 통과한 뒤 무등의 양익(兩翼)을 차고 올라 반도 전역으로 비산했다. 그 노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던” 먼지보다 작은 존재들을 일깨워 ‘시민’이란 정치적 주체로 고양시켰고, 7년 뒤 제헌헌법이 문자로써 선취한 시민적 공화의 이념을 불모의 박토에 착근시켰다. 현재 이 공간의 벅차고도 슬픈 역사를 증언하는 것은 회관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오른쪽에 ‘시민군 편성지’란 동판을 박아 세워놓은 작은 돌비석뿐이다. 그사이 시민회관은 노후화됐고, 대체 문화공간이 곳곳에 건립되면서 기능적 수명마저 다했다.
공연·창작 공간으로 리모델링도심 녹지 복원 계획에 따라 2011년 철거 위기에 몰렸던 이 건물은 지역 문화계 인사들의 발의로 시민 아이디어 공모와 현상설계경기를 거친 뒤 지난해부터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옛 도청 일원에 들어설 아시아문화전당과 연계해 젊은이들의 창작·공연 공간으로 그 가치를 재생시킨다니 적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5월의 그 난입자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지불하며 구현해낸 ‘시적 정의’는 어떻게 될까. 관객의 처지에서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광주일고는 져야 해! 그게 포에틱 자스티스야.”/ “POETIC JUSTICE요?”/ “그래.”/…/ 나는 3루에서 홈으로 생환하지 못한, 배번 18번 선수를 생각하고 있었다.”(황지우, 앞의 시)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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