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마르크스가 예견 못한 성과 속의 변증법

국내 유일의 비잔틴 양식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
성스러움은 맘몬의 세속 질서 안에서도 밝게 빛난다
등록 2013-12-06 13:47 수정 2020-05-03 04:27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평면(왼쪽 아래 도면)에 둥근 아치를 세워 벽과 지붕을 올리고 중앙부에 돔을 얹었다.탁기형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평면(왼쪽 아래 도면)에 둥근 아치를 세워 벽과 지붕을 올리고 중앙부에 돔을 얹었다.탁기형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사라진다.”(카를 마르크스)

현대사회(자본주의)의 역동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진술은 사뭇 시적이어서, 현대성의 명암에 천착했던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즐겨 구사하는 인용구가 됐다. 에 등장하는 이 아포리즘은 3개의 절로 이뤄진 병렬문의 첫 번째 문장인데, 이어진 두 번째 절은 “성스러운 모든 것은 세속화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추동하는 ‘창조적 파괴’의 위력 앞에서 전통적 신분 질서와 가치 체계는 물론, 종교의 원천인 성(聖)의 세계 역시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마르크스는 예견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틀렸고 엘리아데가 옳았다

그러나 이 명민했던 천재의 직관과 달리 종교는 파괴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아니, 그 신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시에 불을 밝힌 십자가는 현실에 미만한 고통의 총량에 비례해 꾸준히 늘었다. 종교의 운명에 관한 한, 마르크스는 틀렸고 미르체아 엘리아데(1907~86)는 옳았던 것일까. 파시즘과의 연루 의혹에 시달리기도 했던 이 루마니아 태생의 종교학자는 썼다. “성에 대하여 내릴 수 있는 정의는 그것이 속의 역(易)이라는 것이다.” 엘리아데에게 성과 속은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속이 없으면 성도 없고, 성이 없으면 속도 없는’ 불가분의 실존 범주다. 성스러움이 드러나기 위해선 속의 세계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고, 성스러움은 오직 속 안에서만 스스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은 이같은 ‘성과 속의 변증법’이 극적으로 펼쳐지는 공간이다. 지금의 경향신문사 자리에 있던 옛 성전을 매각하고 마포로가 굽어보이는 애오개 언덕바지에 새 건물을 지어올린 게 1968년. 한국정교회의 본산인 이곳은 마포로에 고층 오피스 빌딩들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백색의 아치 위로 솟아오른 청동 돔 때문에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었다. 주변 산동네 아이들은 이곳을 ‘대머리 교회’라고 불렀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은 좁지만 완만하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담벼락에 나붙은 공덕1구역 재건축조합 명의의 조합 총회 공고문이다. 파괴와 개발의 파우스트적 욕망은 성 니콜라스의 성체가 안치된 이 작은 언덕마저 비켜가지 않았다. 언덕 정상에 이르니 야트막한 다세대주택 건물군 너머로 공사용 타워크레인이 여기저기 솟아 있다. 재개발사업이 한창인 아현4구역이다. 2015년 이곳은 거대 토건자본의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선다. 성당 경내는 사업 구역에서 제외돼 별 문제가 없다는 게 성당 관계자의 전언이지만, 신자유주의적 토건 질서가 구역 재편을 마무리지을 즈음이면 이곳은 고층의 아파트군에 둘러싸인 고도(孤島)가 된다. 맘몬(Mammon)의 세속 질서가 구축하게 될 견고한 포위망이, 엘리아데의 말대로 이 작은 성소의 거룩함을 오롯이 빛내줄 수 있을지는 누구도 예단 못할 일이다.

동쪽으로 트인 대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이제껏 통과해온 공간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종교학이 말하는 ‘거룩한 실재와의 조우’가 이런 것일까. 그러나 장소의 거룩함은 속된 외부 세계와의 대비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종교 건축물이 갖는 고유한 힘은 이곳에도 완연한데, 그 힘의 상당량은 공간에 구현된 독특한 건축 양식에서 비롯되는 듯했다. 한국정교회의 유일한 대주교 봉직 성당인 이곳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비잔틴 양식이다.

건물이 처음부터 비잔틴식으로 계획됐던 것은 아니다.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가 조창한(79·경희대 건축학과 명예교수)이 애초 참조한 것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가 1956년 미국 밀워키에 지은 정교회 성당(Greek Orthodox Church)이었다. 그러나 조창한의 설계안을 받아본 정교회 쪽이 난색을 표했다. 형태가 너무 현대적이라는 이유였다. “건축주는 이 건물이 한국정교회의 모(母)교회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스탄불의 총대주교청으로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분들 얘기가 ‘이번엔 비잔틴의 전통 양식으로 하고, 조 선생의 설계안은 다음 성당을 지을 때 시도해보자’는 것이었다.”(조창한)

“건물 전체를 돔이 지배해야 했다”

건축주의 설득에 건축가가 물러섰다. 조창한은 정교회 초대 한국인 신부의 아들(정교회는 주교가 아닌 평사제에겐 결혼을 허용한다)인 김창식의 도움으로 설계에 착수했다. 김창식은 그리스 아테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리스통으로 비잔틴 성당 건축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리스 쪽에 요청해 비잔틴 성당의 도면과 사진도 공수해왔다. 정방형의 그리스식 십자가 평면에 철근콘크리트로 아치와 지붕을 세우고 중앙에 철골 돔을 앉힌 형태로 최종안을 확정했다. 전통적인 돌쌓기 방식으로 지어올리기엔 시간과 비용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이다.

성당 내부는 빛과 색채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입구에 놓인 성모자 이콘 너머로 신자석과 전례공간이 보인다(왼쪽). 중앙 돔의 프레스코화에는 ‘만물의 주관자’인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천사와 성모,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위계를 이루며 배치돼 있다.이세영

성당 내부는 빛과 색채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입구에 놓인 성모자 이콘 너머로 신자석과 전례공간이 보인다(왼쪽). 중앙 돔의 프레스코화에는 ‘만물의 주관자’인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천사와 성모,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위계를 이루며 배치돼 있다.이세영

문제는 돔이었다. 당시 국내에 있던 돔 구조물은 일본인이 지은 중앙청과 서울역사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건물들의 돔은 내부 구조를 완벽히 장악하는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1960년 김정수가 철골 트러스 방식으로 조립해 올린 장충체육관이 있었지만, 이 역시 성당 건축에 참조할 만한 사례는 못 됐다고 조창한은 회고한다. “종교 건축과 관공서 건축은 다르다. 비잔틴 성당에서 돔은 하늘을 상징한다. 건물 전체를 돔이 지배하는 형태로 만들어야 했다.” 철골로 반구(半球) 형태의 뼈대를 만들고 철판을 붙여 구조체를 완성한 뒤 원통형 드럼 위에 올렸다. 돔 표면에는 동판을 덧대고, 돔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십자 지붕에는 에게해풍의 붉은 기와를 얹었다. 건축주는 만족했다.

뾰족 아치와 높은 첨탑으로 이뤄진 고딕 성당이 대세였던 당시 상황에서 돔과 반원형 아치가 도드라진 비잔틴 성당의 생소함은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슬람 모스크가 아니냐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성당 관계자는 “모스크 양식이 비잔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외형에서 드러나는 유사성이 적지 않다. 멀리서 성당을 본 외국인 무슬림들이 모스크인 줄 알고 가끔 찾아오곤 한다”고 했다.

성당은 건축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됐다. 비잔틴 양식의 표준 구성인 그리스식 십자가 평면과 펜던티브 돔(Pendentive Dome)의 구조 형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내부를 들여다보면 한층 확연해진다. 성당 안은 말 그대로 ‘아치의 향연’이다. 직경 10m의 중앙 돔은 네 개의 대형 아치들로 지탱되는데,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의 축성 원리가 이와 같다. 다른 점은 벽돌을 주재료로 삼았던 비잔틴의 전통 성당과 달리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했다는 것.

비신자도 성호 긋게 만드는 공간의 위력

내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구조 역학의 기술적 합리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성당 안을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그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십중팔구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고 싶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돔 하단부와 벽체에 뚫린 아치 창으로 스며든 은은한 광선은 그리스도와 성모, 성인들을 형상화한 프레스코 벽화들에 부딪쳐 전방위로 산란하는데, 빛과 색채가 빚어내는 대기의 무늬는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 양가적 감정 상태는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가. 신앙을 결핍한 자의 메마른 지성으로는 공간이 갖는 강력한 힘의 효과라고밖엔 딱히 설명할 도리가 없다. 더없는 강력함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힘, 사람들은 그 힘에 이끌려 성호를 긋고 제단 앞에 부복했을 것이며, 그 행동을 통해 신에 대한 믿음을 다지고 이어왔을 것이다. 공간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을 특정한 주체(호모 렐리기우스)로 구성한 것은 인간이 만든 그 공간이었다.

성당 내부의 프레스코화는 아테네대학의 소존 교수팀이 맡았다. 그리스와 슬라브 성화 특유의 ‘초월적 평면성’이 잘 구현돼 있다. 프레스코화와 함께 성당 내부를 구성하는 중요한 상징물이 그리스도와 성모,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목판 채색화다. ‘이콘’(Icon)이라 불리는 이 그림들은 카타콤에 남아 있던 조야한 이미지들에 로마시대 초상화 기법이 가미돼 그 형식이 완성된 뒤 치열한 내부 논쟁을 거쳐 787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전례물(典禮物)로 공인됐다. 성당에 들어서는 신자들은 입구 안쪽의 좌우편에 안치된 니콜라스 성인과 성모자(聖母子)의 이콘에 입을 맞춘 뒤 신자석으로 향한다.

이콘은 정교회 신앙을 이해하는 데서도 매우 중요하다. 초기 기독교회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정교회는 완전무결하고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논리적·이성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성적 사유의 매체인 인간의 말 자체가 유한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초월자에게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회개와 명상을 통해 영성을 수련하고, 고요와 침묵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를 직관하는 것이다. 이콘은 이때 보이지 않는 초월자와 그가 속한 세계를 가시적 형상을 통해 암시하고 상기시키는 관조의 매체가 된다. 이콘의 이미지에서 드러나는 비현실감은 기법의 미숙함 탓이 아닌, 치밀하게 의도된 표현의 결과다.

지극히 작은 교회가 한국 개신교계에 말한다

고유의 ‘이콘 신학’이 말해주듯, 정교회는 개인의 의지와 수행이 중시되는 영성의 교회다. 한국에 전파된 지 100년이 넘도록 신도 수가 3천 명 안팎에 머무르는 것도 이런 특징과 무관치는 않아 보인다. 물질주의 기복신앙과 배타적 구원관, 도를 넘는 공격적 선교 행태로 물의를 빚는 한국의 개신교회 앞에 이 작은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묵상하라. 겸손하라. 이웃을 존중하라.”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한국정교회 그리스정교, 러시아정교, 동방정교 등으로 불리는 정교회는 예수의 사도들이 이끌던 초대교회의 계승자를 자임한다. 11세기 로마 가톨릭이 분리되는 과정을 겪으며 비잔틴(동로마) 제국과 슬라브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한국에는 20세기 초 러시아가 한반도에 진출하면서 들어왔다. 한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과 연해주로 이주했다 귀환한 조선인 신도들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일본과의 전쟁에서 진 러시아가 철수하면서 공식적 교회 활동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한국인 신도들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다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군의 도움으로 교회를 재건했다. 1968년 정동에 있던 교회를 지금의 아현동으로 옮겼고, 지금까지 서울·인천·부산 등에 7개 교회와 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12명의 사제와 3500여 명의 신자가 있다. 한국정교회는 이스탄불의 세계 총대주교에 의해 2004년 대교구로 승격됐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