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이름으로 시인이 묻는다.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베르톨트 브레히트,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자명한 진리를 재론하지 않겠다는 듯, 시인은 말을 아낀다. 그러나 노동자가 지은 것이 찬란한 문명의 기념비들뿐일까. 감옥과 수용소를 짓고, 고문실과 처형대를 만든 것도 노동자였다. 그리고 그 노동의 배후에는 예외 없이 숙련된 건축가가 있었다.
짓는다는 일이 전문 직업으로 자리잡은 이래 대부분의 건축가는 이 운명의 긴박을 벗어나지 못했다. 회화나 조각, 음악과 달리 태생적으로 돈을 지불하는 자에게 존재를 의탁하는 장르가 건축이었기 때문이다. 의뢰인은 대체로 권력자이거나 재산가였다. 신화 속 건축가 다이달로스 역시 크레타 왕 미노스로부터 일감을 얻는다. 미노스는 그에게 미노타우로스를 감금할 미궁(迷宮)을 짓게 하는데, 건축가의 손으로 빚어낸 첫 작품이 왕의 정적을 가둘 감옥이었다는 사실은 권력과 건축에 관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어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건축가, 다이달로스의 후예들한국 현대 건축의 한 시대를 풍미한 김수근도 동시대 권력을 위해 악명 높은 ‘치안 기계’를 헌정했다. 서울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다. 1976년 완공된 이 건물은 애초 5층으로 지어졌으나 1980년대 초 7층으로 증축됐다. 이 건물은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22일 동안 살인적 고문을 당한 곳이다. 1987년 1월14일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이 5층 9호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물론 김수근은 박종철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사건이 있기 7개월 전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이 ‘고문 공장’의 설계자가 김수근이란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때, 제자와 지인들은 곤혹스러워 했다. 누군가는 “거장이 남긴 졸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했다. “건축가의 설계를 실무자가 변경했을 것”이란 선의의 추측도 나왔다. “건물을 악용한 사람들을 비난할 일이지, 건물 자체를 두고 시비를 걸어선 안 된다”며 ‘사용자 책임론’을 펼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유신 정권이 김수근을 지목해 설계를 의뢰했고, 김수근은 이에 부응해 ‘간첩 잡는’ 대공수사기관의 업무에 최적화된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2005년부터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 중인 이 건물에는 1970년대 김수근 건축을 특징짓는 조형 언어들이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외부를 벽돌로 마감한 것은 앞서 공간 사옥 구관에서 시도된 것인데, 공간 사옥에 쓰인 회색 전돌 대신 이곳에선 검은 벽돌을 사용했다. 사각 창을 외부로 돌출시켜 입체감을 주고, 폭이 좁은 세로 창을 연속해 배치한 것, 주출입구를 왼쪽 모퉁이로 몰아 내부로 함몰시킨 뒤 왼편 부속 건물과의 교차 지점에 개방 공간을 조성한 점도 공간 사옥과 유사하다. 심지어 완공 당시의 층수도 공간 사옥과 같은 5층이어서, 건축가 조한은 이 건물에 ‘공간 사옥의 이복동생’이란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검은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한 것에 대해선 견해가 엇갈린다. 공포심을 유발해 심리적 저항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장치라는 주장이 있지만, 신뢰할 만한 해석은 아니다. 외형을 통해 압도할 작정이었다면 ‘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을 달아 건물의 정체를 숨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김수근은 1960년대 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본관에서 벽돌을 처음 쓴 뒤 1970년대 내내 벽돌을 이용한 조형 실험에 몰두했다. 그즈음 김수근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벽돌이 지니고 있는 따뜻함을 사랑한다. 우리는 벽돌을 한장한장 손으로 쌓아야만 하고, 이것은 나에게 (건축이) 무한히 인간화되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를 떠올렸던 김근태이 건물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건물의 외부가 아닌 내부 구성이다. 특히 조사실이 들어선 5층은 창의 크기와 각 방의 출입문 위치, 조명등의 종류와 기능에 이르기까지 설계자의 세심한 계산과 고려가 엿보인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배치된 16개의 조사실은 마주 보는 방의 출입구가 엇갈리게 배치돼 동시에 문이 열리더라도 맞은편에서 조사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동선의 흐름과 시선의 움직임까지 고려한 치밀한 공간 설계다.
조사실마다 2개씩 설치된 세로 창은 폭이 20cm 정도로 사람의 머리가 통과할 수 없다. 추락이나 투신을 막기 위한 고려로 보인다. 조사실마다 설치된 욕조 또한 용도가 미심쩍다. 가정집이나 숙박업소에 설치된 것에 비해 유난히 길이가 짧아 성인이 들어가 앉으면 다리를 뻗기가 어려울 정도다. 목욕물을 받기 위한 쓰임새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벽은 내부 소음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철제 흡음제로 마감했고, 조명등은 자해를 막기 위한 목적인 듯 내부로 밀어넣은 뒤 철망으로 막아놓았다.
특징적인 시설을 하나 더 꼽으라면 1층 후면에서 5층 조사실 복도로 이어지는 철제 원형 계단이다. 건물로 이송된 피의자들은 정면의 주출입구가 아닌, 후면의 쪽문과 이어진 원형 계단을 통해 5층 취조실로 이동했다. 계단실은 중세 수도원의 첨탑과 비슷한 구조인데, 이 건물에서 조사받은 피해자들은 수사관들에게 이끌려 가파른 계단을 돌아 올라가는 동안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극도의 불안과 공포감에 휩싸였다고 진술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같은 형태의 원형 계단이 앞서 지어진 공간 사옥에도 설치돼 있다는 점이다. 김수근은 사옥의 3층과 5층 사이에 벽돌로 수직의 원통을 쌓은 뒤 중앙에 강철심을 세우고 철계단이 나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밀폐형 통로를 꾸몄다. 지인들이 펴낸 추모문집에는 김수근의 안내로 다락 밀실을 구경하는 ‘특권’을 누렸던 이들의 회고담이 나오는데, 이 원형 계단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형언하기 어려운 흥분과 신비감을 느꼈다고 그들은 고백한다. 건물주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밀폐형 계단실이 그 맥락을 이탈해 수사기관의 건물에 배치되는 순간, 공포를 유발하고 신체를 길들이는 훈육 장치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
김근태는 1988년 펴낸 수기 에서 1985년 9월 이곳에서 고문받던 당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를 떠올렸다”고 술회한 적 있다. 고문대에 알몸이 되어 결박되는 순간부터 그는 모든 권리와 존엄이 박탈된 ‘벌거벗은 생명’에 불과했다. 입시생 자녀의 학업이나 노모의 건강을 걱정해가며, 지극히 사무적인 움직임으로 타인의 신체와 정신을 파괴해가는 기술자들 앞에서 김근태는 해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서동 공간 사옥의 이복동생건물 설계의 어느 수준까지 김수근이 관여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확실한 건 1970년대 들어 주문량이 폭주하자 아틀리에 방식으로 운영되던 김수근의 사무실도 100명이 넘는 대규모 조직으로 개편이 불가피해졌다는 사실이다. 을 쓴 한양대 교수 정인하는 “당시 김수근은 실무자들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면서도, 작품에 대한 명확하면서도 구체적인 개념 혹은 스케치를 실무진에 넘겨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전한다. 설사 김수근이 세부 설계에 깊숙이 관여했더라도 그 공간이 잔혹한 고문시설로 사용되리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공간의 용도를 충분히 예견 못한 정치적 태만함이 설계자의 윤리적 무감각에 면죄부를 줄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나치 시대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는 유대인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가 지은 건축물은 그 자체로 어떤 범죄나 폭력행위에도 연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돼 20년을 복역했다. 죄가 있다면 학살자 히틀러를 위해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다. 실제 반인륜 범죄에 활용된 것은 나치의 권위주의 건축이 아니라, 나치 정권이 볼셰비즘의 온상으로 지목해 폐교시킨 바우하우스의 합리주의 건축이었다. 기능에서 형태를 연역하려 한 이 극단적 이성주의자들의 미니멀리즘은 데이비드 하비의 말대로 아우슈비츠를 위시한 살인공장들에 영감을 제공했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가장 탁월한 연구서로 꼽히는 라울 힐베르크의 에는 살인수용소를 지은 기업과 건축가들이 언급된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 제시된 1942년 아우슈비츠 건설본부는 자체 인력으로 시설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베를린과 쾰른 등에 있는 민간 기업의 건축가와 엔지니어들을 동원해 막사와 가스실, 소각로를 지었다. 동원된 민간 전문가들은 자기들의 작업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짐작하면서도, 어떤 주저함이나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분석은 이렇다. “폭력의 사용은 그 수단들이 목적에 대한 도덕적 평가로부터 분리될 때 가장 효율적이고 비용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분리는 나란히 진행되는 두 과정의 결과로서 나타나는데, 첫 번째 것은 꼼꼼한 기능적 분업이고, 둘째 것은 도덕적 책임성의 기술적 책임성으로의 대체다.”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정부가 주는 감투를 여럿 썼던 김수근이지만, 그가 유신체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예술인이자 엔지니어요, 설계 사무실과 잡지사, 소극장을 운영한 사업가였다. 그는 주어진 설계 용역을 최선을 다해 완수함으로써 지속적인 일거리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직원과 제자들을 먹여살리는 한편, 틈나는 대로 재능 있는 예술가를 후원해 일국의 문화 수준을 살찌우는 ‘서울의 로렌조’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김수근의 작업이 유신체제라는 ‘사회적 기계’를 구동하는 기계장치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다. 유신체제는 ‘총화 단결’이란 구호가 물질화돼 작동하는 거대한 ‘반공 기계’였다. 이 시스템 안에서 주부는 살림하고, 학생은 공부하고, 노동자는 기계 돌리고, 예술가는 창작하고, 경찰은 범인 잡고, 판사는 판결했다.
‘애국’ 앞에 작동 멈춘 도덕적 판단회로공적·사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지극히 일상적인 실천들은, 그러나 ‘우리’와 상극인 ‘타자’들이 눈앞에 제시되는 순간 스스로 움직이는 ‘고발 기계’ ‘고문 기계’ ‘살인 기계’로 돌변해 인간을 파괴했다. 극단적 반공체제 아래서, 그 타자들은 ‘간첩’ ‘빨갱이’ ‘용공분자’ 따위로 불렸다. 건물 구석구석에 그토록 치밀한 디테일을 박아넣은 김수근과 설계팀이 그 공간에서 펼쳐질 끔찍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인식조차 없었을 개연성은 극히 낮다. 그러나 그들의 도덕적 판단회로는 ‘간첩 잡는 나랏일’의 위중함 앞에서 작동을 멈췄다. 그 ‘애국적 판단 중지’가 비극을 낳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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