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버지가 있었다. 신문 스크랩을 하고 그 옆에 글을 쓰는 것이 소시민인 아비의 취미였다. 1959년 스물넷 청 춘에 시작한 스크랩은 34년간 이어져 쉰일곱인 1992년 에 끝이 났다. 25권 분량이었다. ‘묘비’라는 제목의 스크 랩북엔 4·19 혁명에서 황영조의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 달 수상까지 한국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거대한 현대사 이면 생생하게 담겨
한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스크랩북을 넘겨가 며 그에게 딴죽을 거는 것은 20년차 기자인 아 들의 숙명이었다. 봉인된 세월을 열듯 스크랩북 속의 신 문 기사들은 아들을 아버지가 살아냈던 그 시대로 데려 다놓았다. 거기엔 낯설고도 그리운 아버지가 있었다.
고경태의 (푸른숲 펴냄)는 아버지 가 남긴 신문 스크랩이라는 실을 가지고 아들인 저자가 씨줄과 날줄로 교직한 이채로운 역사서다. 제목처럼 이 책은 역사를 현장에 서 있던 국민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의 주인은 유력 정치인이나 권력 가가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취사선택에서 버림받았던 보 통 사람들이다. 정치적인 거대 서사와 굵직한 사건 위주 의 역사 평가가 아닌 일반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눈높 이와 관심사는 이 책만의 차별 지점을 만든다. 이 말은 이 책의 관점이 한국현대사를 다룬 기존 역사서와는 다 른 ‘저널리즘적 입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5·16의 역사적 의미를 논하기 전에 길을 가던 기자가 우연히 쿠데타 군의 공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써 내려간 특종 기사를 통해 긴박했던 그날을 그려볼 수 있게 하거나, 쿠데타 이후 벌어진 숙청을 다루면서 정치적 사건뿐만 아니라 단지 댄스홀에서 춤을 췄다고 쇠고랑 을 찬 이들을 함께 다루는 대목 등에서, 이 책의 재미와 매력은 흘러나온다.
다방 인질극과 대연각 화재를 비롯한 끔찍한 사건·사 고들이 정치적 이슈에 관한 비중만큼이나 크게 다뤄지 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 책에는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 는 이야기와 함께 사회면에 오르내렸던 이름들이 대거 등장한다. 탈주범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언을 남겼던 지강헌과, 최근 또 한 차례 사회면 뉴스에 오르내 린 ‘대도 조세형’ 등이 김영삼·김대중이나 전두환 전 대 통령의 동생 전경환보다 더 자세히 조명된다.
이 책에서 보수적인 아버지의 생각에 진보적인 기자인 아들은 번번이 토를 달지만, 이 책이 세대 간의 이해를 돕 는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사진 기사와 4컷 만화, 만평과 아버지의 코멘트가 담긴 시들은 당시 사회상과 국민 정서를 전달해주는 것과 동시에, 지금은 ‘역사책의 한 페이지’가 된 장면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우리네 부모 세대의 한숨과 슬픔을 공감하게 한다.
동시대인들의 역사서술을 거들다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위세등등한 독재 자들 밑에서 그 시절을 살아낸 필부필부들의 삶이 곧 역 사라고 말하는 저자는, 5월25일부터 한겨레교육문화센 터에서 ‘고경태의 자서전 스쿨’이라는 강의를 열 계획이 다. “한 사람의 ‘나’는 바로 한 권의 책이고, 한 권의 책은 바로 한 사람의 ‘나’다. ‘나’는 책으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나’는 책에 기록할 만한 이야기가 충분하다.” 아버지의 스크랩북을 편집해 아버지 시대의 삶을 역사 로 구성한 저자가 동시대인들의 역사서술을 거들고 나선 까닭이다. (강의 문의 02-3279-0900)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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