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눈을 돌려선 안 돼!”
함께 가는 남자 기자가 당부할 때만 해도 무슨 소린가 했다. “여기자가 있어도 옷을 갈아입으니 당황해선 안 된다고.” 반바지만 입고 훈련하는 유도 선수들 틈도 당당하게 휘젓고 다닌 스포츠부 기자를 뭘로 보나. “난 여자가 아니라 기자야.” 자신 있게 소리쳤지만 사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지난 3월27일(한국시각) 류현진을 만나러 간 나의 첫 메이저리그 출장은 문화적 충격으로 시작됐다. 류현진의 2선발이 확정된 날 찾은 미국 애리조나주 글렌데일의 LA 다저스 전지훈련장 캐멀백랜치 로커룸 표정은 한국과 사뭇 달랐다. 기자의 출입이 자유로운 것은 물론, 무엇보다 넓고 깨끗했다. 가운데 놓인 탁구대 앞에선 잭 그레인키가 팀 동료와 한판 승부를 벌였고, ‘개념선수’로 유명해진 클레이튼 커쇼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책(으로 기억되는 어떤 물건)을 뒤적였다. 심신의 피로를 풀기 딱 좋았다. 류현진은 “메이저리그에 온 걸 달라진 로커룸 환경에서부터 느낀다”고 했다. 전지훈련장이 이 정도니 홈구장의 로커룸은 오죽할까. 각 구단의 누리집에 들어가보면 휘황찬란한 로커룸에 입이 쩍 벌어진다. 류현진은 “환경이 좋으니 훈련도 더 잘된다”고 한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원정팀 로커룸조차 없던 서울 잠실야구장과 비교돼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실야구장은 지난 1월 보수공사에 들어가 개장 30년 만인 4월1일에야 원정팀 로커룸이 생겼다. 지금껏 원정팀 선수들은 복도에 장비와 각종 물품을 늘어놓고 써야 했다. 공간이 있긴 했다지만 좁아서 옷도 복도에서 갈아입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복도에 있던 가방 보관함 위에는 ‘기물 파손시 반드시 본인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라는 코미디 같은 문구도 부착돼 있었다. 한 타자는 “잠실에 오면 내가 프로선수인가, 헷갈릴 때가 많다”고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와 지난 시즌 한화에서 뛴 박찬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한국 최고의 야구장이라는 잠실에도 원정 로커룸이 없어 경기 전 상대팀 선수들과 자주 마주친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잠실은 양반이다. 광주구장에서 경기를 마친 원정팀 선수들은 씻을 샤워장이 없다. 부산 사직구장도 지난해 11월 아시아시리즈를 앞두고서야 3천만원을 들여 낡은 원정팀 로커룸을 새로 단장했다.
‘남’이 쓰는 원정 로커룸은 그렇다 치더라도, 안방 로커룸도 상황은 비슷하다. 사물함에 샤워실, 수면실 등은 갖췄지만 시설이 낡았다. 그나마 최근에 생긴 인천 문학구장이나 포항구장 등 몇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동네 목욕탕 수준이다. 1군 선수만 26명에 프런트, 코칭스태프 등 45명이 23m²(7평) 남짓한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코칭스태프는 선수들이 불편해할까봐 알아서 “선수들만 쓰고 우린 다른 곳에서 갈아입자”고 지침을 정했을 정도다. 동선도 효율적이지 않다. 좁은 공간을 쪼개고 쪼개 휴게실을 만드는 등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다. 한 구단 관계자는 “애초 생활체육 용도로 만든 시설을 프로야구가 시작되면서 야구장으로 쓰다보니 처음부터 선수들을 위한 편의시설 자체가 없었다. 지금 바꾸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했다. 대구구장처럼 오래된 곳은 붕괴 위험성마저 심심찮게 거론돼왔다.
로커룸은 단순히 선수들이 게임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다. 로커의 위치가 팀내 입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프로선수로서 자부심도 느끼게 한다. 류현진의 말처럼 “아, 내가 다저스의 일원이 됐구나” 하는 소속감을 주는 것은 물론이다. 가장 중요한 건 로커룸이 경기 전 선수들의 몸 상태를 최고로 끌어올려야 하는 장소라는 점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지금껏 이런 인식이 부족했다.
다행인 건 최근 몇 년 새 상황이 그나마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전구장은 시즌을 앞두고 리모델링을 하면서 레전드들의 사진을 걸어놓는 등 선수들의 자긍심에도 신경 썼다. 신축하는 대구구장과 광주구장은 설계 단계부터 로커룸을 가장 신경 쓰고 있다. 기아 관계자는 “메이저리그와 일본 야구장을 돌아다니며 선수들의 휴식과 충전을 위한 최적의 환경으로 벤치마킹해 설계했다”고 귀띔해준다. 공간도 지금보다 1.5배 넓고 효율적인 동선으로 로커룸에서 운동장으로 나가는 공간을 최단거리화했다. 대구구장은 바닥에 카펫을 깔아 안락한 분위기를 연출할 예정이다.
류현진 너머로 잡힌 그 남자의 알몸다저스타디움은 1962년 세워진 메이저리그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구장이지만, 지속적인 관리와 리모델링을 통해 선수들에게 최적의 편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국제대회에 갈 때마다 수백만원대의 옷을 사 입히는 일회성 선심을 베풀 게 아니라 선수들이 최적의 환경에서 최상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시설 인프라부터 만들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 ‘맨몸들’이 후루룩 지나갔다.
아뿔싸, 이곳이 로커룸이었지. 샤워실에서 땀을 씻은 선수들이 하나둘 가운만 걸친 채 나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류현진을 바라보는 시선 너머로 한 선수가 몸에 둘렀던 수건을 훌러덩 풀어헤친다. 실루엣이 느껴지지만 절대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당황하는 순간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된다. 돌아가는 눈동자를 애써 잡아보려 눈두덩에 힘을 줬다. 류현진이 웃는다.
남지은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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