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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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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영 제약사를 만들자

등록 2013-02-01 16:11 수정 2020-05-03 04:27

우리는 피곤하면 ‘박카스’를, 머리가 아프면 ‘게보린’을, 속이 더부룩하면 ‘까스 활명수’를, 감기 기운이 있으면 ‘판콜에이’를 사 먹는다. 열나는 아이에겐 ‘부루펜시럽’이, 잇몸이 약한 부모님께는 ‘인사돌’이 딱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의사고 약사다.

‘식후 30분에 읽으세요‘는 “모든 약은 독이다”라고 말한다. 잘못 사용하면 안 쓴 것만 못할 뿐 아니라 독약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게 약이기 때문이다. 이매진 제공

‘식후 30분에 읽으세요‘는 “모든 약은 독이다”라고 말한다. 잘못 사용하면 안 쓴 것만 못할 뿐 아니라 독약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게 약이기 때문이다. 이매진 제공

‘피로사회’가 피로회복제 남용 낳아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가 펴낸 (이매진 펴냄)는 이처럼 약에 취한 한국 사회에 던지는 ‘각성제’ 같은 책이다. 그동안 의약품 안정성과 접근권을 높이려고 다양한 활동을 벌여온 건약이 펴낸 이 책은 실생활에는 가까이 있었지만 정작 잘 몰랐던 약의 이면을 일러준다.

건약은 1987년 6월항쟁의 격변기에 같은 뜻을 품고 모인 약사들과 그 뒤 약대를 졸업한 젊은 약사들이 1990년에 만든 모임이다. 약은 있는데 약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는 곳과 북한과 이라크 등 재난·재해 지역 대상 기초의약품 지원, 생명과 건강을 볼모로 돈벌이에 혈안이 된 제약회사와 의약품의 안전 관리를 하고 약에 값을 매기는 정부기관 감시, 의약품 정책을 미국이나 유럽의 제약회사들에 의존하게 될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 약과 관련된 현장에 참여해왔다.

먼저 퀴즈 하나. ‘간 때문이야~’ 광고로 유명한 우루사는 과연 피로회복제일까? 책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루사는 피로회복제라기보다는 소화제에 가깝다. 우루사의 주성분인 우루소데옥시콜린산은 담즙 분비를 촉진하는 약이다. 담즙은 소화액을 분비해 음식물의 소화 흡수를 돕는다. …굳이 우루사 같은 약이 피로 회복에 효과가 있다는 근거를 찾는다면, 담즙 분비 촉진에 따른 소화 작용이 개선되면서 영양성분의 흡수가 좋아진다는 극히 제한된 이유밖에 없다.”

사실 우루사 말고도 약국에는 피로회복제가 널렸다. 카페인이 든 자양강장 음료나 비타민제, 건강기능식품, 홍삼 등도 피로회복제로 팔린다. 이런 제품들은 건강에 크게 해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피로 회복에 큰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피로회복제를 먹는 걸까? “약국에서 환자들과 상담하며 ‘피곤하면 좀 쉬어야 한다. 쉬는 것도 약을 먹듯이 계획을 짜서 쉴 수 있게 노력하라’고 말하면 십중팔구는 ‘내가 그걸 몰라서 약을 사 먹는 줄 알아? 쉬면 누가 먹여살려준대?’라고 반문한다. 많은 사람들이 피로회복제가 피로의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피곤을 푸는 것보다 피곤한 일상의 도피처로 약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피로가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사회가 강제한 조건의 산물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피로사회’가 피로회복제 남용을 낳는다는 뜻이다.

결국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하셨어요?” 환자들을 꾸짖는 의사와 약사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공정하지 못한 세상에서 ‘약’은,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노동자가 하루를 버티는 ‘힘’이라는 심리의 사회구조적 조건이다. “우리는 무지해서 약을 남용하는 순진한 피해자가 아니라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을 먹는 암묵적인 공모자이기 때 문이다.” 이 책은 “피로회복제는 약국에서 찾는 게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무나 약 먹지 않아도 되는 사회

우리가 약을 밥 먹듯이 먹는 데는 불안을 조장하고 건 강염려증을 주조한 제약회사와 이를 방기한 정부의 책 임도 있다. 제약회사들은 의약품 특허를 내세워 환자들 을 대상으로 횡포를 부리고, 가난한 나라에서 헐값으로 임상실험을 한 뒤 부자 나라에서 약을 판다. 또 효과 좋 은 10원짜리 약은 절판을 시키고 비싼 약을 파는 데 혈 안이 돼 있다. 그런 제약회사를 규제해야 할 정부는 의 료 민영화와 FTA를 국가 경쟁력이라고 주장하며 되레 의료 공공성을 좀먹고 있다.

이러한 ‘제약산업의 불편한 진실’의 대안으로 이 책은 국영 제약사의 설립을 제안한다. 버스·지하철·기차 같 은 대중교통 체계, 전력·수도·가스처럼 공공재 성격이 강한 의약품도 공공 제약사를 통해 생산하자는 것이다. “아무나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고, 약이 필 요한 사람들은 누구나 약을 쓸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몇몇 의약품의 이름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어 렵거나 지루하진 않다. 평이한 문장과 친절한 설명에 술 술 읽힌다. 특히 책 앞날개의 재미있는 저자 소개와 뒷날 개의 “와 섞어 읽으면 감정 조절이 안 된다”는 풍자적인 ‘사용설명서’가 이채롭다.

다음은 이 책이 권하는 안전하게 약 먹는 10가지 방 법. ① 복용 중인 약의 리스트를 만들어 단골 의사나 약 사와 상의하라 ② 약물치료가 꼭 필요한지 판단하라 ③ 노인은 보통 성인 용량보다 적은 양으로 시작하는 게 안 전하다 ④ 새로운 약을 더 먹어야 할 경우 원래 먹던 약 중 그만 먹어도 되는 게 있는지 알아보라 ⑤ 약을 정확한 시기에 중단하는 것도 중요하다 ⑥ 부작용이 나타나면 가능한 한 빨리 대처해야 한다 ⑦ 약을 먹은 뒤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면 담당 의사나 약사에게 이야기하라 ⑧ 약국이나 병·의원을 떠나기 전에 환자나 가족이 약 복 용에 관해 확실히 알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⑨ 쓸모없는 약은 과감히 버려라 ⑩ 새로운 치료 방법이나 약물 사용 을 단골 의사, 단골 약사와 함께 조정하라.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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