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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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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냄새 좋은 동화

김진 변호사의 동해교통 9번 버스의 회차 장소였던 솔밭…
무슨 꿀단지 숨겨놓은 듯 주말이면 ‘풀집 마을’로 가는 이유
등록 2013-01-19 00:06 수정 2020-05-03 04:27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의 생가를 향해 난 길에 동화처럼 봄꽃이 만개했다. 김진 변호사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에 먼저 당도한 어머니가 자전거를 타고 동네 마실에 나섰다. 김진 제공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의 생가를 향해 난 길에 동화처럼 봄꽃이 만개했다. 김진 변호사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에 먼저 당도한 어머니가 자전거를 타고 동네 마실에 나섰다. 김진 제공

나는 여전히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 누구나 자신의 ‘등록기준지’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음에도 내 ‘본적’은 서울 강북의 어느 곳으로 적혀 있다. 전혀 기억은 없지만 그 근처 어딘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을 물으면, 더 애매하다. 아버지의 잦은 실패로 초등학교를 4번 옮겨야 했고, 결국 하루에 버스가 4번 다니고 경운기로 저녁 8시까지만 자가 전력을 쓰는, 강원도 인제군 남면 남전리 쪽박골에서 겨우 졸업을 했다. 읍내 중학교 졸업을 앞둔 아이들 중 여럿이 춘천으로 유학을 갔는데, 신문에서 고교별 명문대 진학 순위를 눈여겨보던 어머니는 어린아이 넷만 데리고 삼천지교를 감행했다. 다들 생전 처음 가보는 바닷가 도시, 강릉으로.

이사 직전에 구한 월셋집은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학교가 반대편에 있어 긴 버스 통학을 해야 했는데, 저녁 8시면 불을 꺼야 하는 탓에 절로 ‘새나라 어린이’가 되어버린 나에게 새벽 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학교에 가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게다가 버스는 안목∼송정∼강문∼경포 해변을 거치는 해안도로를 경유한다. 겨울이면 아침 8시는 돼야 산등성이 너머 해님을 영접하던 산골 아이에게, 동화책 그림처럼 바다 위에서 발가벗고 등장해주시는 태양의 올누드는, 그깟 아침잠쯤은 가볍게 물리칠 화끈한 유인이었다.

하지만 동해교통 9번 버스가 주는 최고의 선물은 따로 있었다. 회차 장소인 솔밭에 정차하는 10여 분. 나무 사이로 조금씩 드리우던 은근한 햇살, 휴대전화 소리 방해 따위가 없던 고요 속에 지저귀는 새소리, 시장으로 향하는 대야들에서 올라오던 두부 냄새, 짭조름한 바다 냄새,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꿋꿋이 이겨내던 소나무 냄새…. 용감한 주인공이 되자고 마음먹었던 때, 그곳에서 내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냄새 좋은 동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무런 주저 없이 정해버렸다. 어른이 되면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야지. 태어나는 곳은 고르지 못하지만 마지막으로 사는 곳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으니 그게 고향일 테다. 처음부터 고향이 없는 모두에게 그렇듯, 전혀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서울 생활과 치솟는 전셋값에 속수무책이던 어느 여름, 전세 보증금에도 크게 못 미치는 돈으로 바로 그곳에 시골집 하나를 구했다. 9번 버스가 멈춰 있던 바로 그 솔밭 옆, 슬픈 운명의 시인 난설헌 허씨가 그리워했던 친정집 발치에, 그녀의 아버지 이름을 따 마을 이름을 지은 냄새 좋은 ‘풀집 마을’(草堂), 내 고향에 돌아갔다.

나머지 가족은 곧장 이사를 했지만, 아쉽게도 당장 서울을 떠나기 힘든 나는 회사 바로 옆에 월세방을 얻어 최소한의 물건들로 자취 중이다. 급한 일이 없는 주말이면 매번 집에 가니까 사람들이 무슨 꿀단지를 숨겨놓았느냐며 묻는다.

하지만 내 가족, 강아지들, 책이랑 모두 그곳에 있으니 나는 그냥 ‘집으로’ 가는 것뿐. 무엇보다 내 마음이 가장 예쁘고 씩씩했던 그때, 그 소나무랑 바다가 있는 영혼의 도시로.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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